사랑시를 함께 읽으며
사랑시를 함께 읽으며
  • 박윤미 충주예성여고 교사
  • 승인 2020.01.05 1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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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엿보기
박윤미 충주예성여고 교사
박윤미 충주예성여고 교사

 

사랑시1

(전략) 등을 대고 나란히 눕던, 당신의 등을 쓰다듬던 그 百年이라는 말/강물처럼 누워 서로서로 흘러가자던 百年이라는 말//와병 중인 당신을 두고 어두운 술집에 와 하루를 울었네(문태준, 百年)

시인은 허름하고 어둑한 술집에 와서 혼자 술을 마신다. 계절은 꽃이 피고 지고 왕버들 새잎이 나고 바람도 살랑이는 푸르른 봄인데, 시인의 마음은 계절을 잊고 어느 어둡고 쓸쓸한 공간에 혼자 있다. 아픈 아내에게 시인은 아마 살뜰하게 사랑한다, 백 년을 함께 하자고 소리 내어 말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아내가 아프다. 오래도록 아프다. 등을 대고 누웠다는 것은, 곁에 있다는 것, 곁에 있을 것이라고 말로 하는 약속보다 더 강한 약속, 그러나 얼굴 마주 보며 사랑한다, 아프지 마라, 오래 같이 살자 그런 말은 못 하는 유한한 시간에 대한 예감. 그냥 그렇게 흐르는 시간을 함께하겠다는 무언의 약속일 것이다. 문득 낡은 술집 시렁 위 베개에 한 땀 한 땀 수놓아진 百年이라는 말에 눈길이 머물고 마음이 머문 이유가 그 사랑의 증거 아니겠는가? 직접 시인을 만났기 때문에 더욱 모든 장면이 생생하게 그려진다. 메밀꽃 하얗게 흩뿌려진 축제장에서 만난 문태준 시인의 평온하고 너그러운 웃음이 감도는 맑은 얼굴이 생각난다. 쓴 소주를 마시면서도 세상을 향한 쓴소리는 하나도 못 할 것 같은 인상이었는데, 그날엔 미처 읽지 못했던 시인의 사랑법을 글로 읽으며, 시인과 함께 술집에 있는 듯 가슴이 저민다.

사랑시2

왼편으로 구부러진 길, 그 막다른 벽에 긁힌 자국 여럿입니다//깊다 못해 수차례 스치고 부딪친 한두 자리는 아예 음합니다//(중략)//굳을 만하면 받치고 굳을 만하면 받치는 등 뒤의 일이 내 소관이 아니란 걸 비로소 알게 됐을 때//마음의 뼈는 금이 가고 천장마저 헐었는데 문득 처음처럼 심장은 뛰고 내 목덜미에선 난데없이 여름 냄새가 풍겼습니다(이병률, 사랑의 역사)

이 시의 제목이 사랑의 역사이다. 시인은 사랑의 대상을 무엇이라 생각하고 이것을 썼을까 궁금하였다. 사람일까? 삶일까?

셋이서 함께 사랑시를 읽었다. 사랑시를 읽자고 한 것은 사랑하게 하고 싶어서였다. 친구가 이 세상으로부터 받는 여러 상처로부터 자기를 지킬 힘을 얻길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무엇보다 굳을 만하면 받치고 굳을 만하면 받치는, 등 뒤에서 누군가 벌이는 일이 그대의 소관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길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앞에 있는 사랑할 사람들을 바라보는 데만 더 집중하길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나쁜 것이 뿌리내리지 않도록 사랑으로 녹여냈으면 하는 마음에서였다.

시를 함께 읽으며, 시인들의 다양한 사랑법을 조금 더 깊이 들여다보았다. 세 사람의 눈을 합한 것은 한 사람의 시야의 세 배 그 이상이 된다. 무엇보다 `함께' 한다는 것 자체가 의미 있다. 별안간 등 뒤에서 받치는 일이 생겨도 함께 할 사람들이라는 무언의 약속 아니겠는가?

시의 개수만큼이나 이 세상 사람들의 사랑법은 정말 다양하다. 특히 동양과 서양의 사랑의 온도와 색깔은 정말 뚜렷한 차이가 있다. 사랑하면서 행복하고 기쁘면 그런대로, 사랑하면서 아프고 슬프면 그런대로, 불꽃처럼 화려하고 치열한 사랑도, 물이 흐르는 것과 같은 사랑도, 각각이 모두 진실한 사랑이다. 사랑시를 읽자고 한 것은 어쩌면 사랑하고 싶어서일 것이다. 이 세상의 다양한 사랑 중, 나는 내 속에서 어떤 사랑을 불러내 보고 싶었던 것일까? 사랑시를 마중물 삼아 마음을 따끈하게 예열하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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