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적공간과 잉여 인간
퇴적공간과 잉여 인간
  • 이영숙 시인
  • 승인 2019.12.22 1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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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엿보기
이영숙 시인

 

내게 하루 중 가장 아름다운 시간을 꼽으라면 해 저물녘, 해가 지상에서 제 역할을 다하고 넘어가는 시각이다. 어둠과 빛이 교차하는 짙푸른 시간은 사뭇 위엄마저 있다. 인생도 그렇지 않을까. 삶의 풍상과 질곡을 견뎌내고 인생의 흐름을 묵묵히 관조하는 황혼 무렵이 가장 아름다운 시간인 것 같다. 지천명을 넘기면서 인생의 무게도 줄어들고 비우므로 채워지는 깨달음도 얻으니 본래적 자아로 사는 맛은 지금이 절정이다. 행여나 신이 내게 젊음을 돌려준다 해도 나는 지금이 가장 행복한 시간이라고 단호하게 말한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늙어가는 것이 아니라 익어가는 것이라는 노랫말처럼 쇠락해 가는 것이 아니라 성숙해가는 과정이다. 과일도 잘 익은 것은 깊고 부드러운 단맛이 느껴지는데 설익은 과일은 떫은맛과 얕은맛을 느낀다. 사람도 과일의 속성과 다를 바 없다.

우리나라에 통섭이라는 화두를 처음으로 던진 최재천 교수는 2020년엔 15세 미만의 어린 인구와 65세 인구가 동등한 시대가 될 것이라고 언급한 바 있다. 노화를 어떻게 볼 것인가에 따라 의미는 천차만별이다.

요즘 `고령화 사회'를 주제로 몇 권의 시리즈 독서를 마쳤다. 오근재 교수가 펴낸 『퇴적공간』을 손에 잡았을 때 제목이 던지는 충격은 매우 컸다. “왜 노인들은 그곳에 갇혔는가”의 부제도 한몫했다. 생산의 주체에서 벗어나면 소멸적 존재로 치부돼 잉여 인간으로 분류되니 자본주의 안에서 인간은 단지 생산 부품에 불과한 것인가라는 자괴감이 든다.

자본주의는 모든 인간을 물화시키고 시장의 효율성만 강조하는 생산성 구도로만 분류한다. 반대로 파고다 공원이나 종로 시민 공원을 잉여인간이 군집한 퇴적공간으로 해석하기보다는 비로소 인간 주체로 살아보는 실존 공간으로 해석하면 어떨까. 노화 현상이 생산라인에서 벗어난 삶에서 일어나는 현상이라면 경제활동이 아닌 다른 점에서 사회적 가치를 창출하는 풍부한 인적 자원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

오래전 95세의 노시인 시바타 도요가 쓴 시집 『약해지지 마』를 주요 텍스트로 하여 200명이 넘는 교회 노인대학에서 `삶을 풍요롭게 하는 글쓰기'라는 주제로 인문학 독서 강의를 한 적이 있다. 즐겁고 활동적인 시간이 아니라 대부분 주무시거나 들락날락할 것이라는 관계기관의 염려와는 달리 얼마나 진지하게 참여하고 공감하는지 온몸에 전율이 일 정도다. 우리 인생의 노동 기간이 역삼각형이라면 퇴적공간이라 구분한 그곳에 사회적 가치를 창출할 방안들은 얼마든지 많다. 앞으로의 노인들은 웬만큼 고등교육을 배운 세대이다. 그런 특성을 고려하여 그들의 정체성과 자존감을 존중하면서 복지정책도 펴야 한다. 오근재 교수의 지적처럼 진정한 복지는 무료로 제공되는 시혜가 아니라 한 끼의 식사와 등가성을 띤 작은 노동의 기회가 주어지는 일이다.

여전히 인간은 죽을 때까지 자신의 능력을 인정받고 싶어 하는 존재이다. 각자의 재능을 살린 사회봉사도 노년을 의미 있게 잘 보내는 길이다. 늙음이란 절망의 이유가 아니다. 이제껏 사회적 자아로 살았다면 본래의 자아, 실존으로 살아볼 민 낯의 시간이다. 헨리 나우웬의 말처럼 늙음이란 희망의 근거이며 점진적으로 성숙하는 것이며, 견디어 낼 운명이 아니라 기꺼이 받아들일 기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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