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욕심을 잠재우는 정자, 진천 식파정(息波亭)
마음의 욕심을 잠재우는 정자, 진천 식파정(息波亭)
  • 김형래 강동대교수
  • 승인 2019.11.24 1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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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시선-땅과 사람들
김형래 강동대교수
김형래 강동대교수

 

진천의 고구려 때 이름은 금물노군(今勿奴郡)이다. 고려 때는 강주(降州)라 불리다가 조선 태종 13년에 진천으로 고쳤다. 진천지역은 예로부터 넓고 기름진 농토에, 비록 큰 강은 없지만 저수지가 많아 농사짓기가 편안하였다. 그래서 인심 좋고 살기 좋은 고을이라 하여 `생거진천(生居鎭川)'이라 불리었다.

이러한 환경적 편의성은 많은 학행이 높은 인물을 배출하였고, 이러한 인물이 모이는 곳에 누정이 자리하였으며, 누정이 있으면 시문으로 무늬지는 풍류가 필연이었다. 진천지역에는 누정 제영(題詠)의 소재가 되는 누정이 16개소가 전해오고 있으나, 현재 식파정, 백원정, 망북정 등 세 개의 누정이 남아 있다.

이중 식파정(息波亭)은 1616년(광해군 8) 이득곤(李得坤, 1587~?)이 세운 정자이다. 이득곤(李得坤)은 학문을 좋아하여 여러 학자들과 친교 하였으며, 이름이 널리 알려지자 많은 학자들이 찾아들었다. 공은 벼슬길에 나갈 것을 권유받았으나, 광해군 때 혼탁한 정쟁이 싫어서 향리에 정자를 짓고 은거하여 학문에 정진하며 후진양성에 힘썼다.

식파정(息波亭)은 말 그대로 “물결도 쉬어가는 정자”라는 뜻으로 마음의 물결(욕심)을 잠재운다는 의미이다. 본인의 호도 `식파정(息波亭)'이니 당시의 혼탁한 세상사에 휘둘리지 않겠다는 이득곤의 의지가 담겨 있다.

현재 식파정은 정면 2칸, 측면 2칸에 홑처마, 팔작지붕의 도리집 형식이다. 원래 두건리 앞 냇가에 세웠으나 퇴락하여 고종 30년(1893) 후손들에 의하여 중건되었다. 이후 백곡저수지 건설로 인하여 마을이 수몰되면서 수차례 이건(移建)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처음 두건리 앞 냇가에 정자를 세울 당시의 두건동은 시인 묵객들에게 무릉도원의 절경을 연상하게 하는 독서지소(讀書之所)로 이름이 높았다고 한다. 정자에 오르면 앞으로 백곡천의 맑은 물줄기와 주변의 아름다운 경관이 한눈에 들어왔을 것이다. 이러한 비경은 최명길(崔鳴吉), 채지홍(蔡之洪), 김득신(得臣), 송시열(宋時熱) 등 이름 높았던 학자들의 시문(時文)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이중 백곡 김득신이 찬한 「息波亭記」에서 식파정의 창건배경·위치·지세·주변경관·미친 영향 들을 더욱 자세히 읽을 수 있다.



이탁(李濁)이라는 사람은 아름다운 군자이다. 그의 천성이 본래 산수의 아름다움을 즐기고, 그 마음이 명예와

이권을 다투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 경치 좋은 곳에 살면서 생을 마치는 것이 평생의 뜻이었다. 어느 해

어느 날 이군이 斗建村에 와서 서서히 살펴보고 두루 관찰하였는데, 거듭된 산봉우리가 솟아나 사방으로

둘러 있고, 그 속에는 평평한 들판이 열렸으며, 큰 내가 깊게 흐르고 흰 모래가 펼쳐있으며, 푸른 벼랑은

병풍처럼 둘러싸여 있었다.

-후략-



이렇게 식파정은 그 이름만으로도 이곳을 찾는 많은 사람에게 흥취와 아울러 수신(修身)의 교훈을 주었음을 알 수 있다.

현재 식파정은 진천읍 건송리 두건마을 뒷산 끝자락에 위치하고 있다. 2013년 백곡저수지 둑 높이기 사업으로 만수위 선 인근에 위치하게 되어 다시 한 번 이건공사가 진행 중이다. 다행히도 이번 위치도 주위로는 노송이 에워싸고 있으며, 앞으로는 시야가 트여서 백곡저수지의 수려한 경관을 바라볼 수 있는 적정한 곳으로 정해졌다.

식파정은 수차례 이건 되었지만 원래의 위치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진천지역을 대표하는 정자 식파정(息波亭)이 앞으로도 처사(處士)의 은거지로서의 정체성이 유지되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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