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전어
가을 전어
  • 강대헌 에세이스트
  • 승인 2019.11.07 1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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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대헌의 소품문 (小品文)
강대헌 에세이스트
강대헌 에세이스트

 

무서리 내린 상강을 며칠 지나서 아침저녁으로 손이 시리기도 한 오늘 이 글을 씁니다. 이 글이 도착한 날에 당신은 어쩌면 밭에서 무와 배추를 뽑느라고 바쁠 겁니다. 사는 게 정신없다 보니 얼떨결에 입동을 맞고 있을지도 모르겠군요.

가을은 어떻게 지냈는지 궁금합니다. 만산홍엽의 만추는 놓치지 않았는지, 풀벌레 소리를 자장가 삼아 잠든 날은 많았는지, 때론 우체국 앞을 서성거리기도 했는지 말입니다.

가을 별미로는 무엇을 즐겼는지도 알고 싶군요. 당신의 식탁 위에 가리비와 꽃게와 대하와 낙지와 송이버섯이 놓여 있었기를 바라지만요.

고소하고 달콤한 맛이 일품인 전어(錢魚)는 또 어떻고요. 오늘 당신에게 쓰는 이 글도 남에게서 들은 말을 옮기고 싶었던 것이니, 나름 전어(傳語)가 되겠군요. 당신과 함께 먹고픈 전어(錢魚)를 대신해서라도, 제가 잡았던 전어(傳語)를 당신의 밥상 위에 살며시 놓고 싶습니다.

얼마 전 숙취로 속이 쓰려 순댓국집에서 순댓국 한 그릇을 기다리고 있는데, 음식점 출입문이 열리더니 여덟 살쯤 되어 보이는 여자 아이가 어른의 손을 이끌고 느릿느릿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두 사람의 너절한 행색은 한눈에도 걸인임을 짐작할 수 있었지요. 조금은 퀴퀴한 냄새가 코를 찔렀고, 주인아저씨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그들을 향해 소리쳤습니다.

“이봐요. 이렇게 손님이 없는데, 다음에 와요.”

아이는 아무 말 없이 앞 못 보는 아빠의 손을 이끌고는 음식점 중간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주인아저씨는 그제야 그들이 음식을 먹으러 왔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저어, 아저씨. 순댓국 두 그릇 주세요.”

“응, 알았다. 근데 얘야, 이리 좀 와볼래.”

계산대에 앉아 있던 주인아저씨는 손짓하며 아이를 불렀습니다.

“미안하지만, 지금은 음식을 팔 수 없구나. 거긴 예약 손님들이 앉을 자리라서 말이야.”

그렇지 않아도 주눅이 든 아이는 주인아저씨의 말에 낯빛이 금방 시무룩해졌습니다.

“아저씨, 빨리 먹고 나갈게요. 오늘이 우리 아빠 생일이에요.”

아이는 찬 손바닥에 꽉 쥐어져 눅눅해진 천 원짜리 몇 장과 한주먹의 동전을 꺼내 보였습니다.

“알았다. 그럼 빨리 먹고 나가야 한다.”

잠시 후 주인아저씨는 순댓국 두 그릇을 그들에게 갖다주었습니다. 그리고 계산대에 앉아서 물끄러미 그들의 모습을 바라보았습니다.

“아빠, 내가 소금 넣어줄게.”

아이는 그렇게 말하고는 소금 대신 자신의 국밥 그릇으로 수저를 가져갔습니다. 그러고는 자기 국밥 속에 들어 있던 순대며 고기들을 모두 떠서 앞 못 보는 아빠의 그릇에 담아주었습니다.

“아빠, 이제 됐어. 어서 먹어. 근데 아저씨가 우리 빨리 먹고 가야 한댔으니까, 어서 밥 떠. 내가 김치 올려줄게.”

수저를 들고 있는 아빠의 두 눈 가득히 눈물이 고였습니다.

전어(錢魚) 얘기하다가 뜬금없이 순댓국으로 샜느냐고 당신에게 타박을 들어도 괜찮습니다. 그게 전어(錢魚)가 됐든 전어(傳語)가 됐든, 당신의 가을 밥상이 넉넉하고 맛깔스러웠으면 했으니까요. 자나깨나 그저 간절한 바람뿐입니다.

/에세이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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