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 바위 위에 세운 소통과 교류의 장 청주 백석정(白石停)
흰 바위 위에 세운 소통과 교류의 장 청주 백석정(白石停)
  • 김형래 강동대교수
  • 승인 2019.09.29 1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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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시선-땅과 사람들
김형래 강동대교수
김형래 강동대교수

 

‘산동(山東)’이라는 명칭은 한남금북정맥 산줄기가 지나고 있는 청주 상당산성 동편 지역을 가리키는 속칭으로, 오늘날 낭성면과 미원면 일대를 일컫는다.
이 지역에는 계유정난 직후 미원으로 입향한 경주 김씨, 갑자사화를 피해 낭성으로 입향한 고령 신씨, 그리고 기묘사화로 피신하다가 미원으로 입향한 남양 홍씨를 비롯하여 의성 김씨ㆍ함양 박씨ㆍ아주 신씨ㆍ보성 오씨ㆍ파평 윤씨 등이 세거하면서 문벌을 높여왔고, 이에 걸맞게 많은 문인들이 배출되었다.
그중 고령신씨는 꾸준하게 중앙 관직에 나아가 서울에서 활동하면서 ‘山東申氏’로 불리어질 만큼 청주지역을 대표하는 세거문중이 되었다. 지역에 고립되지 않고 외부세계와의 적극적인 소통을 이어가던 산동신씨들은 특히, 20세기 초 변혁의 소용돌이 속에서 신채호와 신규식을 비롯한 많은 민족지사를 배출하였다. 이러한 산동신씨 문중의 적극적인 소통과 교류의 전통을 찾아볼 수 있는 곳이 청주시 낭성면 관정리 감천(甘川)가에 북향하여 위치하고 있는 백석정이다.
백석정이 위치하고 있는 머그미(墨井)마을은 고령신씨 집성촌이다. 경북 상주에서 화령을 넘어와 관기-보은-창리-미원-청주를 지나는 교통로에 위치하고 있다. 백석정은 그 길을 지나던 당대의 영남과 기호지방의 저명한 선비와 문인들이 잠시 머물며 문장과 시가(詩歌)를 짓고 소통하며, 교류하던 인문학적 공간이었다.
백석정은 동부주부(東部主簿)를 지낸 백석정 신교(申?, 1641~1703)가 조선 숙종 3년(1677)에 세웠다. 신교는 50세의 뒤늦은 나이에 출사(出仕)하여 10년 가까운 관직 생활을 했는데 이 기간 중, 혹은 관직 생활을 마친 직후 귀거래를 바라는 많은 시가(詩歌)를 창작하였다. 저서인 『마사초(馬史抄)』에 석정별곡 등 2편의 가사 작품과 귀산음 등 22수의 시조 작품, 그리고 3편의 한시 작품이 전하는데, 이는 국문학사에 귀한 자료들이다.
백석정은 정면 2칸, 측면 1칸의 홑처마, 팔작지붕 건물이다. 뒤로는 울창한 숲으로 둘러져 있고 앞은 흐르는 맑은 물을 바라볼 수 있어 자연과의 조화(調和) 속에 시를 짓거나 휴식하기에 적합한 곳이다. 정자 이름은 물가에 기묘하게 돌출한 흰 바위에서 유래한다.
본래의 건물은 중간에 퇴락하여 없어지고 지금의 백석정은 1927년에 후손들이 현 위치에 중건한 것이다. 건물구조는 1단의 낮은 자연석 기단 위에 자연석 초석을 놓고, 그 위에 모를 죽인 네모기둥을 세웠다. 배면 가운데 기둥을 다듬지 않고 자연 그대로 사용한 것이 특이하다. 이는 인공적인 건축물은 곧 자연의 일부이며, 확장이라는 조영자의 자연주의적 태도를 확인할 수 있는 사례이다.
백석정은 건축 자체는 뛰어나다고 볼 수 없으나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잘 이용한 전형적인 풍류관망을 위해 지어진 정자이다.
낭성 머그미(墨井)마을에서 생장(生長)해 파주목사를 지낸 신필청(申必淸, 1647~1710)은 백석정 일대의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팔경으로 설정하고, 계절 따라 달라지는 경치의 아름다움을 노래했다. 특히, 백석정을 중심으로 한 주변 경관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白石秋容瘦 백암의 가을 모습 스산도 하건만/ 淸霜粧晩楓 서리 맞은 늦 단풍 단장을 하네/ 倚欄一樽酒 난간에 기대 동이 술 마시니/ 人在畵圖中 사람이 그림 속에 있구나
지금도 가을이 되면 푸른 물결 위 하얀 바위에 앉아 새빨갛게 물든 단풍으로 둘러싸인 백석정의 멋스러운 경관을 볼 수 있다. 당시 선비들의 소통과 교류의 장 백석정의 느낌이 그대로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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