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의 역사와 부침을 함께한 청주 망선루(望仙樓)
청주의 역사와 부침을 함께한 청주 망선루(望仙樓)
  • 김형래 강동대교수
  • 승인 2019.09.01 2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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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시선-땅과 사람들
김형래 강동대교수
김형래 강동대교수

 

“청주는 실로 우리나라의 한가운데 있는 땅이며, 서울에서 3백리 안에 있다. 옛날에 현인이 가르침을 편 곳이요, 많은 어진 사람들의 교화의 향기가 남아 있다. 민간의 풍속에 학문이 크게 빛나니 동남쪽에서 으뜸이다.”

우암 송시열이 『공북루기(拱北樓記)』에 기록한 청주의 모습이다. 청주는 백제 때 상당현(上黨縣)이라고 불렸다. 신라 신문왕 5년(685)에 서원소경(西原小京)이 설치되었고, 고려 태조 23년(940)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쳐졌다. 청주에 대해 고려 태조 왕건은 “청주는 땅이 기름지고 사람 중에는 호걸이 많다”라고 하였고, 이숭인은 “청주는 실로 동남쪽의 집합지로, 땅이 넓고 인구가 많아서 사업이 번잡하다”라고 하였다.

청주에 고려 공민왕이 피난을 왔던 때가 1361년이었다. 홍건적이 쳐들어와 개경이 함락되자, 왕이 안동으로 피난길에 올랐다가 돌아가는 길에 이곳으로 와서 7개월을 머물렀다. 그전에 피난처를 물색할 때 몇몇 신하들은 개경에서 가까운 수원으로 가자는 이야기를 꺼냈다. 그러나 감찰사에서 수원은 바닷가가 가까워 왜구의 침입이 염려되고, 또 홍건적을 맞아 항복한 곳이기 때문에 인심을 보증하기가 어렵다고 하면서 청주를 추천하였다. 청주는 삼도의 요충지이므로 곡식을 운반하기가 쉽고, 바다와 멀리 떨어져 있으므로 가장 안전한 지역이라고 하였다.

당시 청주에서 두 번의 과거시험이 치러졌고, 그때 과거에 합격한 사람의 방이 취경루(聚景樓)에 걸렸다고 한다. 이 취경루가 현재 청주시내 중앙공원 안에 있는 망선루(望仙樓)이다.

망선루는 고려시대 청주목 관아의 부속 누정이다. 정확한 건축연대는 알 수 없으나,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객사(客舍)의 동쪽에 있었는데, 옛 이름은 취경루(聚景樓)라고 전하고 있다. 기록에 의하면 누정 옆에 연못이 있었다고 한다.

조선시대 누각이 퇴락하여 1461년(세조 7)에 목사 이백상(李伯常)이 중수하고 한명회(韓明澮)가 누각의 편액을 현재의 망선루(望仙樓)로 고쳤다. 하늘의 선녀, 또는 신비한 경치나 은하수 등을 바라본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일제강점기에는 청주보통학교 여자부 교사로 사용되다가 1921년 유도장인 무덕전(武德殿) 신축으로 헐리게 되었다. 1923년 방치돼 있던 해체 부재를 수습하여 남석교(南石橋) 언저리 제일교회 내에 재건하여 청남학교 교사, 세광고등학교 교사로 사용되는 등 이 고장 육영의 요람이 되었다. 이때 원형에 많은 변형이 있었다.

더 이상의 훼손과 변형을 막기 위한 학계와 시민단체의 이전 복원운동이 전개되었으며, 결국 결실을 맺어 2000년에 지금의 위치로 옮겨 원형을 찾아 복원하였다.

복원한 건물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겹처마 팔작집이다. 동측 내부에 목조계단을 만들어 누마루에 오르게 하였다. 누대는 우물마루로 되어 있으며, 사면에는 계자난간이 설치되어 있다.

망선루의 바깥 기둥은 1층과 2층이 하나의 기둥으로 구성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한국의 누정은 각각의 층이 별도의 기둥으로 구성된 층단주 형식으로 되어 있으나, 망선루는 하층과 상층이 하나의 기둥으로 구성된 통주형식으로 되어 있다. 이러한 통주형식은 한국의 누정에서 그 실례가 많지 않다.

망선루는 고려시대에 창건되었으나, 후대로 오면서 수차례 보수와 중건이 있었으며, 근대기에 들어와 이건을 통한 변형이 있었다. 그러나 창건 이후 청주지역과 부침(浮沈)을 함께 해온 역사적 건물로서의 가치가 큰 곳이다. 현재 주로 폐쇄되어 있는 망선루가 시민들에게 개방되어 그 옛날 어진 사람들의 교화의 향기를 맡으며, 모든 세대가 소통할 수 있는 커뮤니티 공간이 되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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