흙의 예술 도자기 생산터 진천 구암리 사장골유적
흙의 예술 도자기 생산터 진천 구암리 사장골유적
  • 우종윤 한국선사문화연구원장
  • 승인 2019.08.25 19:5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역사시선-땅과 사람들
우종윤 한국선사문화연구원장

 

인류가 정착생활을 시작한 이래 현실생활과 사후세계의 꿈을 이어나간 대표적인 유물이 도자기다. 도자기는 흙으로 빚어 구운 모든 그릇을 가리키는 용어이며 바탕흙, 유약, 굳기에 따라 토기(土器),도기(陶器),자기(磁器), 옹기(甕器) 등으로 구분된다.

우리나라 도자기 역사는 1만 2천 년 전 신석기시대 빗살무늬토기부터 시작됐다. 흙을 소재로 한 도자기는 일상 생활용기뿐만 아니라 공예품으로서 사람들의 삶 속에 깊이 배어 있다.

삶의 공간인 집자리와 영원한 안식처인 무덤에 가장 많이 부장된 것 또한 도자기다. 흙의 종합예술품이며 삶의 지혜를 담고 있는 것이다.

진천선수촌 2단계 건립지인 진천군 광혜원면 구암리 사장골에서 도자기를 대량 생산하던 요업생산시설이 발굴됐다. 유적은 덕성산(506m)과 무이산(462m)의 능선이 만나 형성된 깊은 골짜기다. 이곳에서 청자가마(2),도가가마(11),숯가마(2),작업장(1),폐기장(2),취토장(2),건물지(1),소성유구(3) 등 24기의 유구가 조사됐다.

세종실록지리지 충청도 청주목 진천현 조에 “자기소(磁器所)가 1곳이니 현의 서쪽 대삼동(大三洞)에 있고, 하품이다. 도기소(陶器所)가 1곳이니 현의 서쪽 구사리(狗死里)에 있고, 하품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구사리가 변하여 구암리(鳩岩里)가 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구암리 사장골에서 조사된 11기의 도기가마는 역사기록을 뒷받침하는 고고학적 증거가 된다. 땅속에서 찾은 중요한 재발견이다.

청자가마는 지상식 등요로 번조실 내부에 계단이나 불기둥을 시설하지 않은 무단식 단실요이다. 가마는 농로 개설로 굴뚝부가 파괴된 상태이며 가마규모는 남은 길이 8.5m, 너비 1.4m이며 평면형태는 세장방형이다. 청자가마에서는 27,000여점의 자기가 출토됐는데 대부분 잔, 발, 접시, 관 등 일상용기와 병, 반탁, 화분, 향로 등 특수기종도 생산했다. 전체적으로 보면 자기류 중에서 높이가 가장 낮고 구경이 넓은 기종인 접시가 60%를 차지한다. 문양장식은 압출양각기법으로 모란당초문과 당초문을 장식하였고, 음각기법으로 앵무문을 시문하는 등 다양한 문양을 장식했다. 이러한 제작양상은 청자생산의 중심지였던 강진, 부안지역의 청자제작양상과 매우 유사하다.

한편 태안 마도 침몰선에서 자기와 함께 출토된 죽찰(竹札) 기록으로 보면 1호선에는 1207년과 1208년에 청자를 선적하였는데, 이 배에 선적된 청자와 구암리 사장골 청자가마에서 생산된 청자가 기종, 제작기법이 동일한 것으로 확인됐다.

청자기종 및 기형, 음각·압출양각기법, 번조방법 등으로 볼 때 진천구암리 사장골 청자가마의 운영시기는 12세기 후반~13세기 초반으로 가늠된다. 이곳 청자가마는 대전 구완동, 음성 생리, 진천 죽현리, 용인 보정리, 여금 안금리 청자가마터들과 함께 고려시대 중기 청자의 지방확산과정을 잘 보여준다.

도기가마는 11기가 조사됐다. 가마구조는 지상식가마(4기), 지하식가마(7기)이며, 가마규모는 10m 내외의 대형가마와 5m 내외의 소형가마가 있다. 생산품으로는 호, 병, 자배기 등 대형기종이 많다. 지상식 도기가마의 운영시기는 15~16세기, 지하식 도기가마는 청자가마의 운영시기와 동일한 시기로 가늠되어, 청자와 도기가 동시기에 함께 생산되었음을 알 수 있다.

진천구암리 사장골유적은 고려 중기~조선 초기에 청자와 도기를 함께 생산했던 대규모 도자생산단지이다. 옛 도공(陶工)들이 흙을 빚는 아름다운 삶을 살며 질 높은 도기와 청자를 생산하던 터가 지금은 국가를 대표하는 운동선수들이 기술연마에 땀을 흘리는 곳으로 변했다. 청자가마와 작업장은 진천선수촌 정문 뒤편에 모형전시해 교육자료로 활용하고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