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 100주년의 의미를 찾아서
3·1운동 100주년의 의미를 찾아서
  • 김명철 청주 현도중 교장
  • 승인 2019.02.27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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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김명철 청주 현도중 교장
김명철 청주 현도중 교장

 

1905년 을사늑약으로 대한제국은 실질적으로 일제의 식민지 지배에 상태에 들어갔다. 그래서 일제 35년이 아니라 일제 40년이라는 말이 타당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5년 후 1910년 8월 22일 강제병합 조약이 체결되고, 1주일 후인 8월 29일에 병합조약의 공포가 이루어지고, 경복궁 근정전 앞에 일장기가 세워졌다. 5천년을 지속한 한민족의 맥이 끊어지는 치욕을 당하게 된 것이다.

특히 일제는 1910년대 헌병경찰제도라는 세계사에서 유래를 찾을 수 없는 폭력적인 억압과 수탈의 무단통치(武斷統治)를 하였다. 특히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 등 기본적인 정치적 권리와 자유도 누리지 못하게 했으며, 가벼운 죄에도 가혹한 신체적 처벌을 가했던 조선태형령은 인권 유린의 표상이었다. 그리고 토지조사사업과 회사령 등의 정치적 억압과 경제적 약탈로 농민을 비롯한 민중의 생활은 크게 악화되었다. 3·1운동은 일제의 이러한 폭압적인 식민지 지배에 대한 민족의 저항으로 일어났던 것이다. 물론 고종황제의 갑작스런 죽음에 대한 비통함과 일제에 대한 반감, 그리고 직전에 일어났던 동경유학생들의 2·8독립선언은 3·1운동의 직접적인 도화선이 되었다.

올해가 3·1운동이 일어난 지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그래서 의미 있는 다양한 행사들이 국가적 사회적 차원에서 이루어지고 있어 다행이다. `역사를 잃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단재 선생님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우리 민족사의 엄청난 의미가 있는 3·1운동을 재조명하고, 그 뜻을 이어받아 3·1 정신을 새로운 의미에서 계승하고 발전시킬 책임이 후손들에게 있기 때문이다.

과연 3·1운동은 성공했는가? 학자들 사이에서 많은 논란이 있지만 3·1운동을 통해 국민의 독립 의식과 시민 의식의 성장,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립과 체계적이고 조직적으로 추진된 다양한 독립투쟁의 결과 조국의 광복이 이루어졌음을 들어서 실패가 아닌 성공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그러나 완전한 조국의 광복과 온전한 민족의 하나 됨이 성취되었는가를 물을 때 아직도 못다 이룬 통일이 아프게 다가온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고 초등학교 때부터 부르던 노래가 아직도 불리는 현실에 조국의 독립과 광복을 위해 목숨을 초개와 같이 버리셨던 독립 운동가들께 후손으로서 면목이 없다. 3·1운동의 완전한 성공을 위해 우리 후손들은 무엇을 해야 할까?

필자는 3·1운동 100주년과 대한민국임시정부 100주년을 위해 우리 아이들과 어떤 기억을 함께 나눌까를 고민하다가 겨울방학 동안 독립운동가 15분의 초상화를 나무판에 새겨 보았다. 김구, 안창호, 안중근, 유관순, 유인석, 박은식, 신채호, 윤봉길, 이봉창, 이상설, 홍범도, 김좌진, 손병희, 신규식, 이승만…. 이분들의 얼굴과 함께 그 아래 업적과 어록을 간단하게 서각을 하는 내 손과 마음은 영광스러움과 엄숙함에 내내 긴장하며 작업을 하였다.

독립운동가 한분 한분의 소중한 얼굴이 담긴 서각 작품에 니스를 칠하고, 학교 현관 입구에 전시를 하였다. 올 한해를 그분들의 삶과 죽음, 나라와 민족을 향한 그분들의 소망을 되새기려 한다. 그렇게 꿈꾸고 염원했던 세계에서 가장 평화롭고 아름다운 나라, 행복한 통일 한국의 주인공으로 자라갈 우리 아이들을 꿈꾸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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