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아 네월아
세월아 네월아
  • 김기원 시인·편집위원
  • 승인 2019.01.24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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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단상
김기원 시인·편집위원
김기원 시인·편집위원

 

요즘 세월아 네월아 하고 삽니다. 굳이 서두를 일도 없고, 아리고 쓰린 것도 없어서입니다. 열심히 살아온 자의 축복이랄까요, 백수의 특권이랄까요? 뭐 그렇고 그런 겁니다. 좋은 말로 하면 마음의 여유이지만 나쁜 말로 하면 심신의 게으름이지요.

아들 둘을 낳아 키웠는데 둘 다 좋은 색시 얻어 알콩달콩하게 사니 자식 걱정 없고, 공직생활을 한 아내까지 정년퇴직해 연금받고 사니 끼니 걱정 없고, 크게 척지고 살지 않아 피해야 할 사람도 없고 갚아야 할 원수도 없으니 세월아 네월아 하며 사는 겁니다.

부실한 건강이 문제이긴 하나 발을 동동 굴린다고 좋아질 것도 아니어서 그러려니 하며 내게 온 질병들과 애써 친구하며 삽니다. 후배들이 밥 먹자 하면 나가서 밥 먹고 차 마시고, 글 쓰고 싶으면 서재에서 글 쓰고, 졸리면 거실 소파에 드러누워 자고, 날 좋은 날 친구들이 골프치자면 골프 치러가고, 그렇지 않은 날은 탁구장에 가서 즐탁을 하고, 미세먼지가 없는 날은 무심천변 길을 걷기도 합니다.

아내가 영화 보러 가자면 극장에 가기도 하고, 어디론가 떠나자면 배낭을 메고 훌쩍 여행을 떠나기도 합니다. 6살 된 손녀와 3살 된 손자와 카톡으로 화상통화 하는 재미도 빼놓을 수 없는 즐거움입니다. 주로 저녁 식사 후에 하는데 그들의 재롱을 보고 있노라면 시간 가는 줄 모르니 이 또한 세월아 네월아 입니다.

이순을 바라보는 저의 하루 일상이 그러하니 결코 나쁜 팔자는 아닌가 봅니다. 각설하고 `세월아 네월아'라는 말은 시간을 그냥 흘려보낸다, 시간을 빈둥대면서 보낸다는 뜻을 나타낼 때 쓰는 일종의 언어의 유희입니다.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행동함을 말장난으로 속되게 이르는 말이니 썩 좋은 말은 아닌 거죠.

유의어로 천천히, 유유자적, 느릿느릿, 쉬엄쉬엄, 느긋하게, 기다리기 등이 있습니다만 `빨리빨리'란 말이 세계 공용어가 될 정도로 바쁘게 사는 요즘 한국인들에게는 낯설기까지 한 말입니다.

밥도 빨리 먹고, 쇼핑도 빨리하고, 볼일도 빨리 보고, 산에도 빨리 올라가고, 승진도 빨리하려고 발버둥칩니다. 뭐든 빨리해야 직성이 풀립니다. 천천히 느긋하게 즐겨야 밥맛도 좋고 소화도 잘 될 터인데 누가 뺏어 먹는 것도 아닌데 숟가락 들기 무섭게 뚝딱 해치웁니다.

쇼핑도 천천히 둘러보고 해야 좋은 제품을 고를 수 있고, 볼일도 천천히 봐야 실수를 덜 하고, 산에도 천천히 올라야 산의 정취를 만끽할 수 있고, 승진도 뒤처지지 않을 정도면 척질 일도 없고 직장생활도 오래할 터인데 빨리하지 못해 안달입니다. 그렇다고 낚싯바늘 없는 낚싯대를 웨이수이강(渭水)에 드리우고 세월을 낚았던 강태공(姜太公)처럼 살라는 말은 아닙니다.

그는 출사할 때를 기다리는 초인이었고 우리는 모두 고만고만한 범부들이니까요. 하지만 범부라고 뜻을 못 이루거나 행복하지 말란 법은 없습니다. 아니 범부로 사니 더욱 행복해야 합니다. 열심히 일한 당신, 청춘을 직장이나 일터에 바친 당신들은 세월아 네월아 하며 살 자격이 있습니다. 물론 더 일하고 싶은 사람은 더 일해야겠지요.

젊어서 고생은 사서라도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현직이 있고 현업이 있는 분들은 세월아 네월아 하면 안 됩니다. 그러면 국가도 개인도 불행해집니다. 그렇습니다. 일 할 나이엔 부끄럽지 않게 열심히 일해야 합니다. 세월아 네월아는 은퇴 후에 생각해 볼 일입니다. 각자의 방식과 철학대로 말입니다. 아무튼, 종종걸음을 하며 바삐 걷는 사람 틈바구니에서 천천히 느릿느릿 걷는 재미도 제법 쏠쏠합니다.

결혼 주례 부탁이 오면 기꺼이 서주고, 재능기부도 하면서 말입니다. 이상은 쑥스럽기 그지없는 세월아 네월아 타령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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