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 밟기
그림자 밟기
  • 김경순 수필가
  • 승인 2018.10.09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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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문앞에서
김경순 수필가
김경순 수필가

 

다시 또 바다다. 밤새 숙소 앞에서는 파도가 울어 댔다. 평소에도 쉬이 잠에 들지 못하던 내가 어쩐 일인지 파도의 울음이 자장가로 들렸는지 편히 잠에 빠져들었다. 아침에는 밤새 울어대던 파도도 잠잠해졌다. 지금은 팬션 주인장이 일러준 방포전망대를 오르는 중이다. 한적한 산길에 호젓하게 걷는 것도 나쁘진 않다. 이십 여분쯤만 오르면 전망대가 있다고 했다. 원래 산을 잘 타지 못한다. 그런데 오늘은 발걸음이 가볍다. 물론 산이 그리 험하지도 않은 것도 한몫했을 테다. 남들이 들으면 웃을 일이겠지만 동네 앞산도 힘들어 몇 번을 쉬다가다를 했지만, 오늘은 단숨에 올랐다.

해는 어느새 정수리 위를 두 뼘쯤 지나고 있다. 바다풍경을 찍으려 핸드폰을 들었다. 그러다 문득 내 그림자가 보였다. 왜 이리 낯설게 느껴지는 걸까. 수십 년을 나와 같은 세월을 버텼을 터인데, 이렇게 오래도록 자세히 보는 것이 언제였나 싶다. 사진을 찍었다. 그림자도 추억을 간직하고 싶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나는 셀카를 찍는 것을 좋아한다. 그런데 내 그림자를 찍으니 또 다른 느낌이다. 내 옆을 따라다니며 지키는 또 다른 나, 새로웠다. 순간 그림자가 내 뿌리처럼 보였다. 나무의 높이를 보면 뿌리의 깊이도 알 수 있다고 한다. 나무가 하늘을 향해 키를 키우는 동안 뿌리는 그 높이만큼 무섭고 막막한 암흑 속에서 깊이를 만들려고 힘겨운 사투를 벌여야 한다. 뿌리는 손톱을 세우고 다짐을 한다. 이겨야 한다고. 커다란 바위가 앞을 가릴지라도 포기하면 한 된다고. 그래서 강해야 한다고. 뿌리가 깊이 내릴수록 나무는 하늘을 향해 높이 올라갈 수 있는 법. 그런데 사람들은 땅 위의 나무만 보고 감탄을 한다. 그것은 숨겨진 진실은 모른 채 보이는 것만을 보려 하는 사람들의 얕은 식견을 증명한다. 어디 나무만 그러할까. 제멋대로인 요즘 젊은 세대들을 보며 기성세대들은 한탄한다, 하지만 그것이 어찌 아이들만의 탓이라고만 할 수 있을까. 그동안 우리는 아이들이 어떻게 되기를 바라왔는지, 어떤 바람을 가지고 뒷바라지를 했는지 돌아보아야 한다. 그것이 해답을 찾는 길이다.

예전에는 그래도 되었던 일들이 요즘은 그래서는 안 되는 일들이 왜 그리 많은지 모르겠다고 남편은 불만이 많다. 모든 것이 빠르게 변하고 흘러간다. 우리 주변의 모습들은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고 편리해지고 있지만, 사람의 마음은 그렇지가 못하다. 다수결의 원칙, 공동체적 운명, 가부장제, 이런 말들은 이제 과거 속으로 서서히 묻혀 가고 있다.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소수 의견도 존중되는 시대로 점점 달아나고 있다. 어디 그뿐일까. 스스로 개인주의자라 칭하는 사람들이 다방면에서 우월한 존재로 두각을 드러내며, 가정사를 논할 때는 부부가 함께하는 집들이 많아졌다. 그런데도 전후 세대들에게는 그 모든 것들이 억울하게 느껴지는 모양이다. 요즘 남북한의 화합이 급물살을 타고 있다. 하지만, 남북한 평화의 시작을 보는 시각이 극과 극이다. 얼마 전 평양에서는 남북한 정상들이 평화를 위한 네 번째 만남을 가졌다. 그런데 그날 광화문에서는 노인들이 대부분인 보수단체들의 남북한 정상회담 반대 집회가 열렸다. 무엇이 그들을 광화문으로 불러내는 것일까. 그토록 무서운 전쟁을 겪었음에도 평화를 반대한다니 이 무슨 아이러니란 말인가.

나무가 겉으로 드러난 국가라면 뿌리는 단연 국민이어야 한다. 뿌리는 서로 단단히 잡고 깊이를 만들어야 한다. 그런데 뿌리가 깊이가 아닌, 하늘로만 올라가려는 형국이다. 아이들이 건강하고 단단하게 크려면 부모가 넓고 깊은 뿌리가 되어 주어야 한다. 그림자가 우리를 떠나지 않도록, 태양이 하늘 위에서 빛날 수 있도록, 넓고 깊은 마음을 톺아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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