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양구곡
화양구곡
  • 강민식 백제유물전시관학예실장
  • 승인 2018.10.07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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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시선-땅과 사람들
강민식 백제유물전시관학예실장
강민식 백제유물전시관학예실장

 

옥화구곡을 흐른 물은 청천면 화양리에 이르러 백두대간 청화산(해발 984m) 등지에서 발원한 화양천과 만난다. 화양천은 송면을 지나 화양계곡을 이룬다. 화양천은 송면에서 다시 선유동 계곡물과 만나는데, 백두대간 너머 경상도 땅에는 내선유동이 있으니 서로가 포기할 수 없는 경승임엔 틀림없다. 게다가 충북 땅 선유동 일부는 경북 문경과 겹치니 혼란스럽다. 아무래도 선유동은 화양계곡에 비해 관심이 적다. 물길을 따라 넘나들던 영남 남인들의 자취가 강한 것도 한계려니 한다.

화양계곡은 속리산 국립공원에 포함되어 관리주체도 복잡하다. 국립공원관리사무소는 물론 국가 사적이니 문화재청과 실제 문화재를 관리하는 괴산군청의 책임 소재가 애매하다. 때마다 화려한 등산복으로 치장한 사람이 넘쳐나는 화양계곡은 3km에 걸친 구곡으로 역사문화적 가치를 더한다. 버스에서 내려 계곡을 따라 오르거나 국립공원 임야를 뭉개고 만든 사설 주차장에 차를 대고 다시 내려와 1곡 경천벽(擎天壁)으로부터 시작한다.

화양동의 유래는 두 가지가 있다. 이곳에 황양목(黃楊木, 회양목)이 많이 자라 붙여진 것이라 하며, 달리 중화(中華)의 `화'와 일양래복(一陽來)의 `양'을 취한 것이라 한다. `주역'64괘 중 24괘는 복괘(卦)로 `복'은 돌아온다, 본래 상태로 회복한다는 뜻이다. 복괘는 1양, 5음으로 이루어진 괘로, 음의 지극한 곳에서 양이 회복되니 `화양'은 곧 혼탁한 세상에서 바른 세상으로 되돌아간다는 의미, 중화의 부활을 꿈꾼다.

하늘을 떠받드는 높은 절벽인 1곡 경천벽 바로 왼쪽 따로 떨어진 바위에 `화양동문(華陽洞門)'이라 새겼다. 이 새김글은 우암의 글이라 전한다. 구름이 비친 못, 2곡 운영담(雲影潭)은 주자의 시(詩), 하늘 빛 구름 그림자[天光雲影]에서 따왔다. 3곡 읍궁암(泣弓巖)은 효종이 승하한 후 송시열이 이곳에서 통곡한 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읍궁'은 `사기(史記)'황제(皇帝) 고사에서 따왔다. 황제의 승천에 빗대 왕의 승하를 슬퍼한다는 의미이다.

화양서원 앞 너른 공터에는 4기의 읍궁암비가 있어 `그날'을 기억한다. 읍궁암 건너 4곡 금사담(金沙潭) 뒤로 우암이 머물렀다는 암서재(巖棲齋)와 바위에 새긴 글이 많다. 명나라 멸망을 개탄한 `창오운단(蒼梧雲斷) 무이산공(武夷山空)', 명 태조의 글씨 충효절의(忠孝節義), 일부러 지워 흔적만 남은 `화양수석(華陽水石) 대명건곤(大明乾坤)'등이다. 솟아오른 5곡 첨성대(瞻星臺) 아래에도 만절필동, 비례부동, 대명천지 숭정일원, 옥조빙호 등을 새겼다. 선조의 친필 만절필동(萬折必東), 명 의종의 비례부동(非禮不動), 조선이 명의 땅이란 `대명천지(大明天地) 숭정일월(崇禎日月)', 명나라 신종의 글씨로 지금은 잃어버린 옥조빙호(玉藻氷壺)는 임금은 깨끗하고 정결해야 한단다. 6곡 능운대(雲臺)는 채운암을 지키고, 7곡 와룡암(臥龍巖)은 물흐름으로 패인 세월의 흔적을 용의 승천 자욱으로 보았다. 8곡 학소대(鶴巢臺)는 빠질 수 없는 청학(靑鶴)의 둥지를 말한다. 9곡 파곶(巴)은 소용돌이[巴]처럼 휘감은 물결의 절경으로, 많은 이들이 찾아와 새긴 글자가 많다.

우암은 1666년 침류정에 자리를 잡은 뒤, 선유동과 파곶을 오르내리며 풍광을 즐겼다. 이후 80세인 1686년까지 20년 가까이 머물렀다. 물론 적지않은 시간 유배를 떠났으나 해배 후 먼저 달려온 곳이다. 그에게 만년의 기억이 남은 곳이다. 3곡 읍궁암과 4곡 금사담 위의 암서재는 효종의 기일을 기억하고 세찬 계곡수에도 의연했던 우암의 의리를 상징적으로 드러낸 곳이다.

구곡의 설정은 우암 사후 제자인 수암 권상하가 설정하고, 각 굽이마다 남겨진 이름은 단암 민진원이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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