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강가의 청동기시대 마을
남한강가의 청동기시대 마을
  • 우종윤 한국선사문화연구원장
  • 승인 2018.09.02 1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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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시선 땅과 사람들
우종윤  한국선사문화연구원장
우종윤 한국선사문화연구원장

 

1990년 9월 8일부터 11일까지 4일간 중부지방에 평균 452㎜의 집중호우가 내렸다. 충주에도 440.5㎜의 큰 비가 쏟아졌다. 제17호 태풍 도트의 영향이다. 1925년 을축년 이후 65년 만의 대홍수이다. 이 두 차례의 홍수로 중요한 선사시대의 마을유적이 드러났다. 을축년 대홍수로 한강 둑이 붕괴되면서 신석기시대를 대표하는 서울 암사동유적이 발견되었고, 1990년 집중호우로 남한강변 충적지가 깎여나가면서 청동기시대에 마을을 이루었던 충주 조동리유적이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충주시 동량면 조동리 조돈마을 앞 충적지에 조동리 유적이 있다. 충주댐과는 3㎣ 떨어진 남한강변에 자리한다. 집중호우와 충주댐의 긴급방류로 갑자기 불어난 물과 빠른 물살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아, 밭으로 이용되던 충적지의 퇴적층이 1m쯤 깎여나가면서 이곳에 살았던 청동기인들의 생활면이 노출되었다. 1990년 9월 10일 충주 루암리 고분을 발굴하던 중 소식을 듣고 찾아간 조동리 유적은 마치 평화롭던 마을이 무참하게 짓밟혀 폐허 된 모습이었다. 집의 구조물 흔적, 어지럽게 흩어진 많은 양의 토기와 석기들, 군데군데 불탄 흔적과 뚜렷한 집자리 흔적들이 처참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마치 긴급한 상황에서 급하게 마을을 떠난 듯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유적에 대한 기초적인 정보 수집이나 보존대책 없이 원상복구를 위한 공사가 급히 이루어졌다. 또다시 인위적인 유적 훼손이 이루어진 것이다. 조사 후 복구를 하였다면 더 많은 청동기시대 생활상에 관한 정보를 얻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크게 남는다. 그로부터 6년 후인 1996년. 이곳에 수해방지를 위한 조동제 축조공사가 계기가 되어 조동리 마을유적의 조사가 이루어졌고, 그 후 1997년, 2000년 등 3차례 조사하였다. 조사결과 집자리 10동, 야외 불땐자리[址] 49기, 움[竪穴] 18기, 돌무지[積石]유구 1기, 도랑유구 7기 등 청동기시대 생활유구 85기가 조사되었다. 청동기시대에 큰 마을이 있었음이 확인된 것이다.

집자리는 네모꼴, 긴네모꼴, 타원형으로 다양하며, 집자리 면적으로 볼 때 적어도 60여명 이상이 이곳에 마을을 이루며 살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불을 이용하여 취사, 난방, 조리, 제습 등의 기능을 하는 불땐 자리는 집 밖에 여러 형태로 존재하고 있다. 이는 마을공동체에 필요한 용도로 사용된 것으로 축제, 제사, 의례 등의 행위가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출토유물은 토기 800여점, 석기 1000여점인데, 그중 그물추가 210점, 화살촉이 140점으로 높은 비율을 보인다. 또한 집자리와 움에서 쌀, 보리, 밀, 조 등의 탄화된 곡물 낟알과 도토리, 박씨, 복숭아씨 등 열매씨앗이 출토되었다. 이로 볼 때 남한강변에 마을을 형성한 청동기시대 조동리 사람들은 농사짓기와 식물채집, 물고기잡이, 짐승사냥 등 다양한 생계방식으로 풍족한 삶을 이어갔던 것으로 보인다.

조동리 유적에서 발견된 집자리의 구조와 유물의 특징들은 타지역과 구별되는 뚜렷한 지역적 특색을 지니고 있어, 남한강유역의 지역문화를 대표하는 청동기시대의 새로운 유형인 `조동리유형'으로 분류되며, 최근 학계에서 새롭게 주목받고 있다. 조동리 마을은 청동기시대 전기부터 중기까지 지속되며 집의 구조와 생활에 필요한 도구들을 타지역으로부터 수용, 계승하고 전통을 유지하면서도 자체적으로 점진적인 변화를 이끌어 왔다는 점이 주요한 특징이다. 이미 중원지역에는 청동기시대부터 지역적 특색을 갖춘 문화가 존재하였던 것이다. 이것이 중원문화의 주요한 뿌리가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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