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가 하는 말
나무가 하는 말
  • 김경순 수필가
  • 승인 2018.08.28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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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문앞에서
김경순 수필가
김경순 수필가

 

밤이 되면 정원은 하늘공원이 된다. 높이 떠 있던 달도 커다란 몸을 잠시 누이러 내려온다. 자신들의 잎에 달을 앉히고 싶어 나무들은 온몸을 흔들어 반짝인다. 별들도 살그머니 내려와 앉았다 가고, 먼 길을 나선 바람도 슬그머니 몸을 기대본다. 그런가 하면 무서운 낯빛을 한 구름이 방문을 할라치면 어느새 달도 별도 숨을 죽이고 어디론가 숨어 버리고 만다. 깊은 밤, 낮은 흙 담을 밟고 달이 총총히 집으로 돌아가면 이슬은 촉촉하게 나뭇잎을 씻어준다.

나무들의 집 옆에는 사람의 집이 있다. 나무의 편에서 보면 관리인인 셈이다. 말이 관리인이지 구경꾼이나 다름이 없다. 지난봄에는 입 큰 목련이 입을 봉긋하니 오므리고 있는 모습에도 예쁘다며 탄성을 지르더니, 수다쟁이 라일락이 우르르 피었을 때는 코를 연신 킁킁거리며 “좋다, 좋다”하는 통에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나무들이 이번에는 화려한 옷을 즐겨 입는 연산홍에게 한번 뽐내 보라 했더니, 관리인이란 사람은 `너 예쁘다'라는 말만 해주고는 허리를 구부리는 게 아닌가. 지난봄 산에서 이사 온 하얀 제비꽃이 다소곳하게 피어 있는 모습에 넋을 잃은 듯했다. 그 바람에 샘쟁이 연산홍은 몇 날 며칠을 얼굴을 붉히었는지 모른다. 나무들은 이 나무 저 나무를 보며 말을 걸어주는 관리인이 싫지만은 않다.

하지만 나무는 가끔 두렵기만 하다. 하늘을 향해 열심히 키를 키우고, 살을 찌우면 사람은 며칠을 나무 앞에서 이리보고 저리보고는 예고도 없이 커다란 가위를 들이댄다. 속절없이 잘려나가는 애채들의 아우성도 사람의 귀에는 들리지 않는 모양이다. 알고 자르는 것인지 모르고 자르는 것인지 키도 맞지 않다. 그저 까치발로 서서 가위가 닿는 부분이 잘려나갈 부분이다.

그런 날, 나무 밑의 작은 식물들은 쥐죽은 듯 조용하다. 그럴 수밖에 없다. 사람의 눈에 띄기라도 한다면 뿌리째 쥐도 새도 모르게 뽑힐 참이다. 그나마 사람의 발길에 차이고 밟히는 것은 복 중에 복이다. 뿌리만 세상 밖으로 뽑혀 나가지 않으면 우리는 다시 키를 키우고 꽃을 피워 씨앗을 만들 수 있다고 말하는 듯하다. 사람들이 말하는 소위 `잡초'인 그들은 덩치가 큰 나무들에 비해 번식력도 왕성해 자손을 퍼트리기는 아주 쉬운 일이다. 그래서 풀들은 더욱더 소리를 죽이고 땅을 향해 낮게 엎드린다. 풀들에게 그것은 생존의 법칙이 되어 버렸다.

욕심은 금물이다. `환삼덩굴'과 같은 덩굴성 풀들은 욕심이 정말 많다. 바람을 타고 허락도 없이 들어와서는 나무들의 온몸을 타고 기어오르기 일쑤다. 개중에는 햇빛이 잘 드는 곳에 자리를 잡게 되면 덩굴에는 어느새 주르륵 수 많은 식솔들을 이끌고 기어오르는 녀석도 있다. 하지만 꼬리가 길면 잡히는 법, 사람의 눈에 띄는 날에는 그 많은 식솔이 뿌리가 뽑혀 마당 한가운데 널브러져 태양으로부터 뜨거운 형벌을 받으며 죽어가야만 한다.

오랜만에 하늘에서 비가 내린다. 비는 마술사다. 새득새득 말라가는 푸새와 나무도 비를 마시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 일어서게 하는 힘이 있다. 오랜만에 정원이 시끄럽다. 커다란 나뭇잎들이 바람의 지휘에 맞추어 빗소리를 박자 삼아 춤을 춘다. 그 속에서 조심스레 얼굴을 내민 풀들도 새살 대며 작은 머리를 연신 흔들고 있다.

초록 생명의 어울림이 아름다운 지금은, 비 내리는 초가을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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