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도 죽어 가는 밤
풀도 죽어 가는 밤
  • 김경순 수필가
  • 승인 2018.07.31 1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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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문앞에서
김경순 수필가
김경순 수필가

 

키 큰 참나리 꽃이 허리를 휘청이며 두리번거리고 있다. 그늘이라도 있으면 머리라도 들이밀 작정인지 머리를 이리저리 움직이며 탐색 중이다. 연일 이어지는 폭염에 나무도 풀도 짐승도 사람도 지칠 대로 지쳐가고 있다. 한 줄금 소나기라도 뿌려주면 좋으련만 하늘은 청명하기만 하다.

며칠 전, 옛 친구를 만났다. 그 친구 직장 근처에 마침 볼일도 있고 해서 내가 연락을 하고 만난 자리였다. 가끔 소식을 듣긴 했어도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누어 보기는 이십여 년만이다. 어느새 우리의 머리에는 희끗희끗한 나이 듦의 모습이 닮아 있었다. 우리는 서로 살아가는 얘기보다 옛 추억을 더 많이 이야기했다. 오래된 친구와 나누는 오래전 이야기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어졌다. 잊고 있던 내 모습이 그 친구로 인해 다시 살아나곤 했다.

읍내에서 직장을 다니던 나는 그때 어울려 다니던 친구들이 있었다. 서로 힘들 때는 위로도 해주고, 힘이 되어주곤 했었다. 격의 없던 친구들이라 그런지 내가 결혼을 하고도 우리 집에서 남편도 함께 어울려 놀곤 했다. 그런데 남자 녀석들이 결혼하면서 멀어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우리는 언제부터였는지 모르게 잊혀져 갔다. 그리고 십여 년이 흐른 후, 카페에서 차를 마신 것이 고작이었다.

반백의 나이를 훌쩍 넘겨 만난 친구는 푸근한 인상의 아저씨가 되어 있다. 나도 친구의 눈에 편한 모습의 얼굴로 보였으면 좋으련만. 무슨 말을 해도 이해되고, 웃어넘길 수 있고, 서운해지지 않는 나이, 그게 지금 우리 나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참 편안했다. 순간 남편이 초등학교 동창모임을 갈 때마다 퉁망을 주었던 일이 새삼 미안해지는 건 왜일까.

사람에게 추억이 없다면 아마도 삶이 무의미해 질 것이다. 뒤도 돌아볼 새 없이 살다 문득문득 차오르는 추억, 가끔 그것은 사막을 걷다 만나는 오아시스가 되어 주기도 한다. 그것은 우리가 또 내일을 살아갈 수 있게 하는 힘은 아닐까. 친구란 생각만 해도 미소 짓게 되고, 편안해지는, 그것은 아마도 오래된 친구들이리라.

가만 보니 키 큰 참나리 잎겨드랑이에 층층으로 살눈이 박혀있다. 살눈은 심지 않아도 때가 되면 제가 떨어져 다시 잎을 틔우고 자란다고 한다. 그렇다고 해서 저 많은 살눈이 잎을 틔우고 키를 키우기는 쉽지 않다. 자리를 잘 잡고 양분을 충분히 받아야 가능한 일이다. 모든 세상살이가 그렇지 않을까. 수많은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지속적인 관계를 맺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더구나 이해득실을 바탕으로 만나는 관계는 그 만남이 매우 짧다. 친구가 되는 일도 이와 같다. 서로 신뢰를 바탕으로, 이해와 배려가 받쳐주어야 진정한 친구로 이어진다. 약속도 없이 아무 때나 찾아가도 반겨주는 친구. 내게는 그렇게 허물없이 지내는 오래된 친구가 있다. 그러고 보니 내 삶이 헛되진 않았던 모양이다.

참나리 옆에서 키를 키우던 개망초가 말라가고 있다. 개망초는 밤이 되면 뜨겁던 태양을 피해 숨이라도 제대로 쉴 줄 알았을까. 하지만, 태양의 뜨거운 열은 밤이 되어도 식을 줄을 모른다. 밤이 되면 다시 살아 날줄 알았던 희망도 점점 사라지고, 이 밤 풀도 죽어가는 밤이다. 그 곁에서 살눈을 꼭 품어 안은 키 큰 참나리는 눈을 질끈 감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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