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집 사이
두 집 사이
  • 김경순 수필가
  • 승인 2018.06.06 1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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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문앞에서
김경순 수필가
김경순 수필가

 

뒷집 주인인 할머니는 작년 봄이 끝날 무렵 쓰러져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요양원으로 가셨다고 했다. 그렇게 일 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뒷집은 주인이 바뀌기 시작했다. 사람이 자주 밟아 들이던 마당으로 난 길은 조금씩 푸성귀들이 차지했다. 그렇게 여름, 가을이 지나는 동안 잡풀들도 어디서 소식을 듣고 날아와 무성히도 마당과 정원에 자리를 잡아 놓았다. 올봄, 주인이 없는 뒷집은 이제 초록 생명과 동물들이 자신들의 거처로 만들어 놓았다. 다소곳하니 장독대 옆에서 피어난 골담초 위로는 덩굴 식물들이 온몸을 칭칭 감고 올라오고, 그렇게 주인의 보살핌을 받던 일명 `화초'들은 점점 아름답던 그 모습을 제대로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빈집은 뒷집만 있는 게 아니다. 우리 집 우측으로는 빈집이 또 한 채 있다. 그 집주인은 몇 년 전, 직장을 따라 청주로 이사를 가고 그 집은 세를 주곤 했었다. 그런데 세 들어 살던 사람들이 나가고 일 년이 넘도록 사람이 살고 있지 않다. 두 빈집은 천양지차다. 그곳은 집을 빙 둘러 온 마당을 콘크리트로 해 놓았다. 그래서인지 그 집은 식물들도 집 없는 동물들도 기웃거리지 않는다. 다만, 길고양이들이 다른 집을 가기 위해 잠시 거쳐 가거나 바람만이 휘둘러 갈 뿐이었다. 그래서인가 사람이 사는 집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굳이 손질을 하지 않아도 당장에라도 사람이 들어와 살아도 될 듯 그렇게 언제나 온전해 보인다. 그나마 그 집을 거처로 삼는 것이 있다면 겁 없는 거미만이 거대한 집을 지어놓고 먹잇감을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인가. 우리 집 주방으로 난 큰 창으로 보이는 뒷집은 요즘 나의 관심사가 되었다. 곤줄박이 부부가 보이던 것은 올봄이 한창 무르익을 때였다. 어쩌면 그 이전부터 들락거렸을지도 모른다. 다만, 내 눈에 그때부터 띄었을 뿐이니까. 뒷집은 낡은 기와집이다. 곤줄박이는 낡은 기와집 처마 밑에 집을 지으려는지 연신 풀 쪼가리나 나무쪼가리를 물어 나르고 있었다. 집주인이 있을 때는 보이지 않던 놈들이었다. 그런데 어찌 알고 보금자리를 그리 짓고 있는지 놀라울 따름이다. 뒷집에서 벌어지는 풍경은 경이로움 그 자체였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초록 생명은 각자의 자리에서 꽃을 피워 올리고 있었다. 주인에게 사랑을 받던 화초뿐 아니라 주인에게 미움을 받고 뽑혀나가던 풀꽃들은 앞을 다투며 피어나고 있다. 하지만 이제는 그 기세가 분명 달라져 있다. 주인에게 눈총을 받으며 뽑히고 버림받던 풀꽃들은 덩치를 늘리고 영토를 늘려서 그 화려함이 이제 `화초'의 기세를 누르기에 충분했다.

두 집 사이에 있는 우리 집의 초록 생명은 그 모습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비비추 속에서 몸을 바짝 엎드리고 있는 망초와, 목단 그늘 아래서 노랗게 얼굴을 붉히고 있는 민들레는 분명 지금 뒷집에서 벌어지는 모습에 부러울 것이다. 하지만 모든 것에는 영원한 것이 없다는 것을 그들은 알고 있다. 그들은 아마도 바람을 통해 망초와 민들레에게 너무 두려워 말라고 위로를 하고 있을까. 자신들도 예전에는 그랬다고. 더불어 자신들의 미래가 지금이 끝이 아니니 후회나 미련도 갖지 말라는 말도 덤으로 얹었을까. 왜냐하면 그들은 우리 사람보다 훨씬 그 이전부터 지혜롭게 사는 법을 터득했을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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