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품, 그 밑
거품, 그 밑
  • 김경순 수필가
  • 승인 2018.05.22 2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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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문앞에서
김경순 수필가
김경순 수필가

 

옛날 옛날, 바다에 살던 인어 공주는 바다 위의 인간 왕자를 보고 사랑에 빠진다. 공주는 자신의 아름다운 목소리를 마녀에게 바치고 인간의 다리를 얻는다. 하지만 아름다운 사람의 다리를 가진 공주가 되었음에도 말을 할 수 없음에 왕자는 다른 여인과 결혼을 하게 되고 인어공주는 사랑하는 남자를 죽여야 할 운명에 처한다. 작가는 과연 누구의 손을 들어주었을까? 인어공주는 자신의 삶과 왕자의 삶을 맞바꾸지 못하고 물거품이 되고 만다.

안데르센은 19세기를 충실히 살다간 작가이다. 그의 작품에는 따뜻한 인간미가 담겨 있다. 하지만, 아쉬움은 있다. 인어공주가 자신이 왕자를 구해 준 본인이라는 것을 밝히는 방법은 없었을까? 미운 오리새끼가. 오리가 아니고 백조라 할지라도 같이 자라고 키워준 형제들과 어미가 같이 더불어 살게 할 수는 없었을까?

내가 어렸을 때는 안데르센의 동화와 전래동화에 빠져들곤 했다. 그런 동화를 읽으며 나는 힘세고 멋진 남자를 만나고 싶다는 꿈을 꾸며 어린 시절과 청소년기를 보냈다. 그리고 이십대 초에 남편을 만나 순종적인 여인으로 살아왔다. 어디 나만이 그렇게 살았을까. 내 나이또래를 비롯한 내 어머니도 그렇게 살아가셨을 터이다. 동화에서 보면 그렇게 살면 행복해 져야 했다. 하지만 반백의 나이를 넘어서면서 나는 자꾸만 뒤를 돌아보고 있다. 그런데 왜 행복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 걸까?

요즘 우리 사회는 거대한 남자와 여자의 싸움이 시작된 듯하다. 남자들은 아마도 여자들의 시시비비에 비웃음을 날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아무리 남자들이 거대한 바위일지라도, 혹여 여자들의 시위가 계란일지라도 언젠가는 그 바위가 더러워질 것이고, 그 비릿한 냄새에 못 견뎌 여자들의 말을 귀 기울여 줄 날은 올 것이다. 그동안 우리는 작은 물방울과도 같은 약한 촛불이 거대한 바위와도 같은 사회도 바꾸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나는 아메리카노 커피를 즐겨 마시는 편이다. 그런데 가끔씩은 거품이 가득한 카푸치노 커피를 주문하는 날도 있다. 그날은 왠지 기분이 좋거나 아주 좋지 않거나 하는 날이다. 풍성한 거품에 계핏가루로 한껏 치장을 한 카푸치노는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함을 더해주고, 마음을 위로해 주기도 한다. 거품을 천천히 먹다 보면 세상이 그렇게 달달하고 부드러우면 얼마나 좋을까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렇게 마시다 보면 어느 순간 예상치 못한 텁텁하고 쓴맛에 정신이 번뜩 든다. 달달함 밑에 그런 맛이 숨어 있으리라고 어찌 예상이나 할 수 있을까. 꼭 내 사는 모습과도 같다. 나는 사람을 만나면서도 내가 보는 그 모습이 거품이라고 생각해 보지 않았다. 그냥 보이는 모습이 좋아 인연을 맺곤 했다. 하지만 종종 그 사람의 진짜 모습에 상처를 받는 일이 허다분하다. 그 거품 밑을 생각하지 않았기에 벌어지는 일들이다. 어찌 보면 세상 모든 관계는 거품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람 사이도, 상품도, 직업도, 정치도, 경제도 모든 게 거품으로 가득하다.

인어 공주가 거품이 되어야 했던 이유도 작가 안데르센 또한 남성우월주의의 그 시대의 남자라는 데서 그 연유가 있다. 그 시대는 아무리 지위가 높은 공주라 해도 말을 못하고, 진실을 밝히지 못하는 가녀린 여자라면 물거품이 되어야 했다. 하지만 이제는 그래서는 안 된다. 어린 아이들에게 교훈이라는 무서운 동화와도 같은 말로 불합리성을 정당화시키는 이사회의 무서운 거품은 더 이상 만들지 말아야 할 것이다. 여자들의 외침이 한낱 거품처럼 보일지라도, 제발 남자들이여 거품 속 그 밑을 끝까지 보아주시라. 여자들은 남자들의 아래도, 적도 아니다. 여자들은 단지 남자와 여자가 같이 동등한 세상을 살아가고 싶은 소박한 꿈을 꿀 뿐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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