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치의 함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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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경순<수필가>
  • 승인 2018.03.27 1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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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문앞에서
▲ 김경순

나는 가끔씩 사소하게 느껴지던 것들에 대해 감동을 받을 때가 있다. 보도블록 위를 비집고 서 있는 들풀들, 아파트 베란다 사이에 빈 틈새를 집 삼아 보는 이로 하여금 안타까움을 사며 살아가는 나무. 후손을 남기려는 집념은 사람보다 식물이 한 수 위인 것 같다. 언젠가 나무의 유전자와 사람의 유전자가 90% 이상이 일치한다는 기사를 보았다. 하지만 사람이나 식물이나 살아가는 데는 법칙이 있는 것이다.

오래전의 일이다. 우리 집에는 한울타리 안에 지금 사는 집과 오래되고 허름한 흙벽돌집이 또 한 채가 있었다. 그러던 것이 담장이 헐리면서 그곳에 연결되어 있던 흙벽돌집도 자연 없어지게 되었다. 황토로 변해버린 넓은 마당에는 어디서 날아오는지 이름도 알 수 없는 잡풀들이 여기저기 자라나기 시작했다. 비가 오면 더 강인해져서 호미로 캐내어야만 뽑히는 잡풀들.

맞벌이를 한다는 이유로 풀 한번 제대로 뽑지 못하고 살아가던 어느 날 그날은 휴일이고 해서 풀을 뽑으려 여기저기 살펴봤다. 풀을 뽑다 마당 한쪽으로 눈이 갔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우리 집 마당 한쪽으로 오래된 다래나무가 한 그루 서 있었다. 가을이 되면 언제나 달콤한 열매를 선물해 주던 나무였다. 소방도로가 나면서 굵은 가지들을 모두 잘라버려 의지할 곳을 잃어버린 잔가지들은 땅을 의지 삼아 뻗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다래나무는 온데간데없고 엉겅퀴풀이 나무가 되어 다래나무를 온통 뒤엎어버린 것이다. 다래나무가 있다는 것은 자기의 존재를 알리려는 듯 겨우 보일락말락 내밀고 있는 몇 장의 잎 새 뿐이었다..

엉겅퀴는 더 이상 풀이 아니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다. 두 손으로 잡고 뽑아도 뽑히기는커녕 끊어지지도 않는다. 그동안 단단하게도 성을 지어 놨다. 엉겅퀴나무와 근 두 시간을 싸워야만 했다. 엉겅퀴에 가려서 빛도 제대로 보지 못했는지 그나마 어린 다래나무가지들이 더욱 연약해 보였다. 다래나무 뿌리 밑에는 몇 년마다 견분(犬糞)을 넣어주곤 했다. 그 자양분을 엉뚱하게 엉겅퀴가 먹고살았던 모양이다. 엉겅퀴의 잎 새들이 햇빛을 받아 반짝인다. 이제 엉겅퀴는 나무가 아니다. 풀로 죽어갈 뿐이었다. 시들어가는 엉겅퀴를 보니 왠지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바로 건너편 집 앞 공터에는 집을 부순 잔해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 그곳 잡풀들이 쓰러져있는 엉겅퀴를 보고 있는 듯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부러워했던 엉겅퀴를 이제는 안쓰러워하면서 말이다. 아무리 뿌리가 깊어도 내가 서 있을 자리가 아니라면 언젠가 뽑혀져 나온다는 것을 저네들도 느끼고 있는지도 모른다. 공터 위에 있는 잡풀들은 어느 누가 뽑으려고도 하지 않는다. 오히려 지저분한 쓰레기더미 위를 잡풀이 집을 짓고 사는 것이 더 낳을 듯하다. 그곳에는 개똥참외도 자라고 호박도 제집을 넓히며 나날이 뻗어가고 달개비도 한옆에서 꽃을 피우며 살아간다. 흙만 있다면 어느 곳이든 살려고 하는 끈질긴 들풀의 생명력.

우리는 오늘도 얼마나 많은 들풀을 밟고 다닐까. 우리가 아무렇지도 않게 밟고 지나가는 들풀들도 아픔을 느낄지도 모른다. 사람은 다치면 피가 나거나 상처가 되어 남는다. 식물 또한 가지가 부러지면 수액이 나온다. 그들의 피인 것이다. 식물과 사람은 닮은 곳이 많다. 하지만 식물이나 사람이나 자기의 위치를 알아야 한다.

살아있다는 것은 역시 강한 것인가. 널브러져 있는 엉겅퀴 어느 곳에도 당당함이 사라져 버렸다. 하늘이 맑다. 이제 더 이상 이 햇볕도 엉겅퀴에겐 먹을 수 없는 밥이겠지. 어린 다래나무 잎 새 위로 햇볕이 또르르 굴러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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