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드랑이에 날개 달린 장사 신경행
겨드랑이에 날개 달린 장사 신경행
  • 김홍숙<괴산군문화해설사 · 소설가>
  • 승인 2017.12.03 1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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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해설사에게 듣는 역사이야기
▲ 김홍숙

신경행(辛景行1547~1623)은 자는 백도이며 호는 조음으로 시호는 충익(忠翼)이다. 본관이 영산인 신경행은 1547년 7월 12일 자시에 괴산군 청안면 문방리에서 아버지 신질과 어머니 영동 김씨 사이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보통사람보다 뛰어났으며 씩씩하고 도량이 컸다. 본성이 어질고 글 읽기를 즐겼으며 일찍부터 남달리 글짓기를 잘했다. 부친은 아내에게 말하기를 “이 아이는 반드시 현달할 것이오, 나는 이 아이가 현달함을 보지 못하겠지만 부인은 자식의 공양을 받을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지금의 청원군 강내면 석화리에 사는 섬계 이잠(李潛)선생의 문하에서 수학했다. 스승의 아들 서계(西溪)이득윤(1553~1630)과 지금 내수읍 비상리에 살고 있던 백음 변경복과 절친했다.

그는 스승 이잠으로부터 도학(道學)을 배우고 무예를 익혔는데 몸이 몹시 날렵하고 머리가 아주 영리하여 하나를 보고 배우면 열을 통달하므로 이잠 선생이 깊이 총애했다. 마을에서 크고 높은 가지의 감을 따지 못해 안타까워할 때 그가 단숨에 올라가 감을 따자 마을 사람들이 `그의 겨드랑이에 날개가 달려서 날아다니는 장사'라고 했다.

석화리에 있는 이잠 스승댁에서 글공부하다가 청안의 집에 와서 점심을 먹고 가면 아직도 선생님은 식사 중이어서 친구들로부터 축지법을 하는 신동으로 불리기도 했다 한다. 27세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31세 되던 1577년 9.28일에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정자로 관직생활을 시작했다.

1592년 9월10일에 한산 군수로 제수되었으며 선조임금이 김응남에게 호서지방을 방비할 적임자를 추천할 것을 비변사에 하교했다. 김응남이 답하기를 “오직 우리는 왜놈 침략 방비를 다 해야 할 뿐이오니 괴산, 남원, 옥천 등지에 훌륭한 의병장을 보내야합니다. 신경행은 청렴하고 활을 잘 쏘니 의병장으로 거두어 서용하여야 합니다.”라고 신경행을 적극 추천했다.

1596년 6월 충청도 관찰사인 도원수 이원익은 신경행을 한산 군수에서 다시 종사관으로 전임하도록 했다. 그때 이몽학이 반역 무리와 함께 난을 일으켜 홍산현, 임천군, 정산현, 청양, 대흥을 함락시키고 홍주성으로 진격하고 있다는 전갈을 받았다. 그는 홍주 목사 홍가신과 더불어 난을 섬멸하고 나라의 위태로움을 없애고 백성의 불안과 사회의 혼란을 평정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큰 공적을 쌓았다. 조정에서는 그를 [청난공신 3등]으로 책봉하고 영성군과 분충출기청난공신으로 봉해졌다. 이때 신경행의 초상화를 그려 후세에 전하라 명했다.

광해군 즉위 2년에 명나라의 사신 관압사로 임명하여 명나라에 갔을 때다. 당시 조선에서는 명나라에 마필을 비롯하여 농공산물을 조공했는데 그때마다 명의 사인들이 억지트집이나 반송을 하며 매우 불손하여 작폐가 심했다. 신경행은 이 일을 관리하는 명의 제독에게 상세하게 글을 올려 폐단을 알렸다. 이에 명의 신종황제는 그의 용기와 비범함을 가상히 받아들여 크게 상을 주고 곡물로만 조공할 것을 명했다 한다. 그는 1611년 벼슬을 사양하고 고향 청안으로 내려와 문방3리에 운수정(雲水亭)을 짓고 좌구산 계곡 반계 주변에 조은정을 지었다.

그의 문집 [조은집]에 실려 있는 [반계증우시첩]에 유몽인, 이시발, 이호민, 김치, 윤근수, 이산해, 이수광 등과 주고받은 시문이 실려 있다. 친구인 이득윤이 만사와 제문을 지었다.

또한 송상현의 장남 송인급과 시를 주고받았으며 조은집에 실려있다. 조일전쟁 때 중국 사신으로 온 주지번과도 [차주지번운]과 시를 주고받았다. 이렇듯 신경행은 문무를 겸비한 인물이며 청안면 문방리 군방서원 [애연사]에 배향되었다. 묘소는 증평군 남차리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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