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막이 마을에서 만나는 노수신과 수월정
산막이 마을에서 만나는 노수신과 수월정
  • 김홍숙<괴산문화해설사 · 소설가>
  • 승인 2017.11.12 20:0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문화해설사에게 듣는 역사이야기
▲ 김홍숙

괴산의 명소로 유명해진 산막이 마을에 도착하면 호수 한 편에 작고 아담한 [수월정]이라는 정자가 있다. 바로 노수신의 적소이다. 마지막 낙엽이 지는 호숫가를 돌아서 노학자를 만나보자. 수월정은 노수신의 10대손 노성도가 건립하였으며 1952년 괴산댐 공사로 이전하였다.

정면 3칸 측면 2칸 홑처마 팔작지붕 물림집으로 귀양살이 하던 곳이라 허름하지만 水月亭이라고 쓰인 현판이 있다. 대청을 사이에 두고 띠문살이 달린 방이 두 칸으로 소재 선생과 수발을 들던 노비가 한 칸씩 썼다고 한다.

유배생활 중 갈은동의 아홉 명소를 9곡으로 정하고 “연하수석 정일건곤”이라고 하였다.

`하늘에는 안개와 노을 땅에는 물과 돌이 어우러지니, 천지에 하나뿐인 아름다움'이라고 한다.

노수신(1515~1590)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며 학자로 자는 과회, 호는 소재, 이재, 여봉노인, 본관은 광주이다.

조부는 풍저창수를 지낸 노후이며 부친은 활인서 별제를 지낸 노홍이다. 모친 성주이씨는 예조참판 이자화의 딸이다.

1531년 17세에 당시 성리학자로 명망이 있었던 탄수 이연경(李延慶)의 딸과 결혼하고 장인의 문하생이 되었으며, 1541년에는 회재 이언적(李彦迪)과 학문적 토론을 벌였다. 1543년 식년문과에 장원한 뒤에 성균관 전적(典籍)에 제수되었다가 홍문관 수찬(修撰)으로 옮겼으며 다음해에 시강원 사서가 되고 사가독서를 하였다. 1545년에 사간원 정언이 되어 대윤의 편에 서서 이기를 탄핵하여 파직시켰다.

그러나 1546년 명종이 즉위하고 소윤 윤원형이 을사사화를 일으키자 이조좌랑의 직위에서 파직되어 충주로 낙향하였다. 이듬해 순천으로 유배되었다가 이어 양재역 벽서사건에 연루되어 죄가 가중되어 진도로 이배되었다. 이때 진도의 풍속이 혼례라는 것이 없고 남의 집에 처녀가 있으면 중매를 통하지 않고 칼을 빼들고 서로 쟁탈하였다. 이에 그가 예법으로서 섬 백성들을 교화하여 드디어 야만의 풍속이 없어졌다.

또한, 귀양살이하는 동안에 이황, 김인후 등과 서신으로 학문을 토론하고 [대학장구(大學章句)]와 동몽수지(童蒙須知) 등을 주석하였다.

1565년 명종이 즉위한 지 20년 만에 비로소 을사사화의 피해를 입은 사람들을 풀어 주었는데 그는 양이 되어 지금의 괴산군 칠성면 사은리 산막이로 옮겼다.

1567년에 선조가 즉위하자 풀려나 즉시 교리에 기용되고 이어서 대사간, 부제학, 대사헌, 이조판서, 대제학 등을 지냈으며 1573년에는 우의정, 1578년에는 좌의정을 거쳐 1585년에 영의정에 임명되었다.

그 뒤 1588년에 영의정을 사임하고 영중추부사가 되었으나 이듬해 10월에 정여립의 모반사건으로 기축옥사가 일어나자 과거에 정여립을 천거했다 하여 대간(臺諫)의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다.

그는 시, 문, 서예에 능했으며 경일 공부에 주력할 것을 강조하고 도심미발(道心未發), 인심이발설을 주장했을 뿐만 아니라 양명학(陽明學)도 깊이 연구하여 주자학파의 공격을 받았다. 한 편 승려인 휴정(休靜), 선수(善修) 등과도 교분이 있었으므로 그 학문이 불교의 영향을 입기도 하였다. 저서로는 [소재집]13권 8책이 있다. 충주의 팔봉서원, 상주의 도남서원, 봉산서원, 진도의 봉암사, 괴산의 화암서원(花巖書院 ) 등에 제향 되었다. 시호는 문의(文懿)이며 뒤에 문간(文簡)으로 고쳤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