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격과 유근
유격과 유근
  • 김홍숙<문화해설사 · 소설가>
  • 승인 2017.09.24 1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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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해설사에게 듣는 역사이야기
▲ 김홍숙

괴산군 소수면에는 유격과 유근 형제의 유적과 묘소가 있다. 선조임금이 얼마나 사랑하였는지 이들을 따라가 보자.

유격(柳格)1545~1584)은 조선 중기의 문인으로 자는 종부, 호는 청만, 본관은 진주이다.

아버지는 진사 유영문이며 어머니는 연흥부원군 안세언의 딸이다. 서경 유근의 형이다. 부친이 일찍 세상을 떠나 큰아버지 유창문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1568년 진사에 합격한 뒤 학행으로 천거되어 선른참봉이 되고 1580년 알성시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이후 예문관 검열에 제수되었다가 전직되어 대교, 봉교, 성균관 전적, 한성부 참군을 역임하고 사간원 정언에 5회나 임명되었다. 모친상을 당하여 애절함이 지나쳐 병을 얻어 1584년 40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1605년 둘째 아들 유시행이 선무공신 원종일등이 되어 승정원 도승지에 추증되고 1614년 장남 유시회가 위성급정란 원종일등으로 책봉되어 영의정에 증직되었다.

서예에 뛰어나 유성룡으로부터 칭찬을 받기도 하였다. 묘소는 소수면 몽촌리 능내에 있으며 신도비문은 동생 유근이 짓고 글씨는 당대 명필가 김현성이 썼다.

유근(柳根)1549~1627)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자는 회부, 호는 서경, 고산 혹은 은병거사 이며 본관은 진주로서 유격의 아우이다. 진사 유광문에게 입양되었다. 15세에 지천 황정욱에게 수학하였으며 1570년 생원과 진사시에 합격하고 퇴계의 문인이 되었다. 2년 후에 별시문과에 장원하여 성균관 전적이 되었다. 예조좌랑으로 옮겼으며 1573년 홍문록에 뽑혔다.

1575년 사가독서를 하였고 이듬해 호조, 예조, 병조, 형조, 공조의 5조 좌랑을 역임하였다. 이 해 가을 사간원 정언으로 제수되고 이어 질정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예조에 서용 되었다가 흡곡현령으로 나갔다. 3년 동안 정사를 돌보면서 갖가지 폐단을 제거하였는데 그가 돌아가게 되자 백성들이 선정비를 세워 그리워하였다. 이 후 예조를 거쳐 사헌부 지평으로 옮기고 정언. 종묘서영. 성균직강에 제수되었다. 이 해에 생모와 부친상을 당하였다. 1583년 지평에 제수되었다가 병조정랑으로 바뀌었는데 업무를 정밀하게 처리하여 율곡 이이가 장관으로 있으면서 그를 큰 그릇으로 여겼다. 이때 북쪽 변방에 사변이 있어 율곡과 함께 모든 조치를 의논하여 처리하였다. 1585년 수찬. 교리. 헌납을 역임하고 경기도 어사로 나아갔다가 이조정랑에 제수되었다. 1587년에는 문신정시에 다시 장원하였다.

이 해에 일본의 중 현소가 사신으로 오자 [선위사]에 특별히 임명되어 학문과 문장으로 현소 일행을 탄복케 하였다. 이 후 의정부 검상이 되어 사인으로 승진하였다.

이듬해 양어머니 상을 당해 괴산의 묘 아래에서 시묘살이하였다. 1590년에 사간원 사간에 제수되고 이후 홍문관 응교. 사간. 사복시정. 사인. 전한을 역임하고 직제학으로 승진 승정원 동부승지에 제수되었다. 좌승지에 오르고 건저문제로 하여 송강 정철이 화를 당할 때 그 일파로 몰려 탄핵을 받았으나 문재(文才)를 아끼는 선조임금의 두둔으로 화를 면하였다.

이듬해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주까지 선조를 호종하면서 난을 피하고 예조참의. 좌승지를 거쳐 예조참판에 특진 되었다. 이후 경기도와 충청도 관찰사에 나갔으며 1596년 충청도 관찰사 때에 괴산읍 제월리에 고산정(孤山亭)을 짓고 광해군 때 낙향했다.

1597년 5도 병마부체찰사가 되어 좌의정 윤두수의 추천으로 명나라가 산동으로부터 선천. 철산에 실어나르는 군량 수백만 섬을 경강까지 운반할 운향검찰사가 되어 추운 겨울에 그 책임을 완수하여 명나라 장수들을 크게 놀라게 하고 왕으로부터 치하를 받았다.

1599년 돌아와서 지중추부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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