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어숍 J
헤어숍 J
  • 강대헌 <에세이스트>
  • 승인 2017.09.21 1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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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대헌의 소품문 (小品文)
▲ 강대헌

제 머리가 아직 멀쩡해요. 대학시절부터 지금까지 어림잡아도 400번 이상 남들에게 머리를 맡겼는데도 말이죠. 제 머리를 무대 삼아 현란하게 가위춤을 추던 그들은 모두 안녕하겠죠.

머리를 자르러 갈 때마다 두 가지 걱정을 합니다. 헤어숍이 문을 열었을까, 헤어 디자이너가 갑자기 바뀐 건 아닐까 하는 식이에요. 가던 곳이 닫혀 있어도 차질이 생기는 것이고, 고객의 스타일을 아는 사람이 없어졌다는 것도 즐거운 일은 아니니까요.

마음에 드는 헤어숍을 찾는 일도 그리 만만치 않죠. 헤어숍의 분위기나 서비스도 알맞아야겠지만, 헤어 디자이너가 너무 강하게 리드를 하는 성격이거나 머리 모양을 자꾸 빗나가게 하는 것은 피하고 싶은 겁니다.

올해 봄이었어요. 헤어숍을 다른 곳으로 정한 게 말이죠.(다니던 곳에선 염색약을 머리카락도 아닌 부위에 바르기 일쑤였고, 얼굴에 묻은 염색약을 지우느라고 샴푸 중에 몇 십 분을 고개를 뒤로 젖히게 한 적도 있었어요.)

사는 동네 주변 거리를 길 잃고 방황하는 어린 양처럼 두리번거리다가 새로운 곳이 성큼 눈에 들어왔던 겁니다. 헤어숍의 이름이 남달랐어요. `자름'이란 곳이었어요.

“나는 당신의 머리를 자르겠어요”라는 식으로 100퍼센트 본래의 목적에만 충실한 이름이었어요. 이름을 보는 순간 제 머릿속에서 종소리가 울리는 것 같았죠. 아무리 치장을 한다 해도 곁가지밖에 되지 않는 일들이 주류처럼 돼버린 세상에 경종을 울리는 것 같았죠. `대미필담(大美必淡)'이란 말도 떠오르더군요. 크게 아름다운 것은 담백하기 마련이니까요.

새로운 선택은 주효했어요. 헤어숍도 괜찮고, 헤어 디자이너도 지나치지 않아서 편하답니다.

얼마 전엔 제가 조금 엉뚱한 주문을 했어요. “하던 대로 해 주세요”라고 말하지 않고, “짧게 해 주세요”라고 말한 겁니다. 샘플 이미지를 보여달라고 하기에 짧은 머리를 한 추성훈 사진을 스마트폰에서 찾아 보여주었지요.

“모히칸 스타일이군요.”

“네, 맞아요. 모히칸.”

머리를 자르는 동안 눈을 꼭 감고 있었어요. 살짝 눈을 떠서 제 몰골이 어찌 변해가는지 보고도 싶다는 유혹이 억새에 부는 바람처럼 살랑거렸지만, 기어코 참아냈지요.

“다 됐습니다”라는 말에 눈을 뜨고 보게 된 거울 속 남자는 제가 맞았지만, 25년 만에 재개봉해서 다시 나타난 영화 `라스트 모히칸(The Last of the Mohicans, 1992)'의 다니엘 데이 루이스(Daniel Day Lewis)와는 너무 거리가 멀었어요.

“군대 또 가려구요?” “젊어보여요.” “실연당했어요?” “강호동이네요.” “시원합니다.” “앵그리버드 같군요.” 여러 반응을 듣고 있지만, 저의 대답은 한결같습니다. “방금 툭 떨어진 도토리 같지요?”

다음엔 누구의 헤어스타일을 보여주고 머리를 잘라야 할지, 해가 갈수록 하늘로 다가서는 굴참나무의 속처럼 고민이 단단해집니다.

/에세이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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