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전설
잃어버린 전설
  • 이영숙<시인>
  • 승인 2017.07.16 2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세상엿보기
▲ 이영숙

소사나무 숲 사이에서 사슴 한 마리가 얼굴을 내민다. 슬픔이 그렁그렁한 얼굴에서 고독과 애수가 읽힌다. 아마도 들풀 탐사 일행 대부분은 일제 강점기 우리 민족의 슬픔을 형상화한 노천명 시인의 「사슴」을 기억해낼 것이다.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이여
언제나 점잖은 편 말이 없구나
관이 향기로운 너는
무척 높은 족속이었나 보다

물속의 제 그림자를 들여다보고
잃었던 전설을 생각해 내고는
어찌할 수 없는 향수에
슬픈 모가지를 하고 먼 데 산을 바라본다 -노천명, 「사슴」 전문


굴업도의 해무가 몽환적으로 흐르는 개머리 능선에서 먼 바다를 내려다보던 사슴 한 마리. 주객이 전도된 자리에서 우리 쪽을 바라보는 사슴의 고독한 눈우물이 깊다. 본래 이곳은 저들의 낙원, 하나 둘 인간의 문명에 밀려 마지막 남은 이곳에 터전을 잡았을 것이다. 본래적인 풍경인데 생뚱맞게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헛바람 쐬는 일을 좋아하여 친구 따라 나선 이번 생태 여행은 개인적으로는 탈 인간 여행이다. 안도현의 시 쑥부쟁이와 구절초도 구별하지 못하는 「무식한 놈」에 들지 않으려고 기회가 오면 동행한다. 생태계의 보고 굴업도에서 동식물과 동화된 1박 2일은 `잃었던 전설'원시의 세계에서 자연인으로 산 진초록 시간이다. 해안가 순비기 군락 사이에서 발견한 박각시 애벌레, 마주치면 싱겁게 웃으며 달아나는 달랑게, 거인의 엄지손가락만 한 풀무치, 덕물산 중턱에서 만난 콩중이와 팥중이, 주홍빛 현란한 매미나방 애벌레, 적막을 깨는 소요산매미, 검정 망태 뒤집어쓰고 한유하게 오가는 거저리, 땅속에서 일사불란하게 올라오는 담흑부전나비, 서로 공생을 이루며 사랑스럽게 노니는 숲은 그대로가 경전이다.

동식물 도감을 대조하며 보물 찾듯 환호하는 들풀 탐사대의 해맑은 얼굴은 유년의 뜰에서 보았던 낯익은 고향 동무의 모습들이다. 각처에서 모인 서른 명의 들풀 탐사대, 생태전문가들의 이구동성을 귀에 담느라 큰 천남성 잎사귀처럼 촉수를 곧추세웠던 이틀, 조흰뱀눈나비 꿈처럼 날아오르는 고즈넉한 숲에서 구름을 베고 누운 장자처럼 소요유(逍遙遊)한 시간도 이제 꿈처럼 아련한 `전설'이다. 원시의 자연을 들여다보면 어쩌면 문명의 인간사회보다 더 진화하고 조화로운 곳이다. 환경에 동화할 줄 알고 필요한 양분만큼 교환하며 공생 관계를 이루는 그 세계야말로 이 시대가 따라야 할 법도이다. 그에 비해 인간이 사는 문명사회는 서로 겉돌며 욕망한 만큼 몸살 앓는 곳이다. 올빼미처럼 눈을 부릅뜨고 살다가도 아주 가끔은 자문한다. 정말 무엇 때문에 이 세상에 와서 숨 가쁘게 살고 있느냐고.

온몸 가득 피톤치드 가득한 초록으로 채우고 식물성 감성으로 돌아갈 배에 오르는데 개머리 능선 쪽 분주한 움직임이 포착된다. 모두가 빠져나간 능선에서 사슴의 무리가 한동안 우리 쪽을 바라보다 떼를 지어 내달린다. 묘한 기분이다. 슬프고 애수 어린 것은 사슴이 아니라 인간이다. 자신을 사슴과 동일시한 여류시인 노천명의 슬픈 자화상은 도시문명에서 전사처럼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이다. 인간의 잃어버린 전설 `향기로운 관'을 조롱이라도 하는지 오랫동안 멀뚱멀뚱 바라보던 사슴, 사슴의 초점에 잡힌 피사체로서의 인간의 모습은 어떠할지 궁금하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