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에서 만난 사람(2)
인도에서 만난 사람(2)
  • 박윤미<충주예성여고 교사>
  • 승인 2017.01.15 1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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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엿보기
▲ 박윤미

이름도 아름다운 엘로라에 갔을 때였다. 아침 일찍부터 서둘러 버스를 타고 30분쯤 달려 도착하니 저 멀리 거북처럼 엎드린 산이 보였다. 벌써 달궈지는 산자락 아래에 34개의 불교, 힌두교, 자이나교 석굴이 줄지어 있었다.

아주 오랜 옛날에 데칸 고원에 뜨거운 용암이 흘러넘쳤다. 서서히 땅이 굳어 인류의 터전이 되고, 왕조가 바뀌고 종교가 변화하는 인도의 역사가 흘렀다. 그중 5세기에서 10세기 사이에 수 세대 인간의 땀과 인내가 거대한 현무암의 돌산을 깎아 인류의 정제된 정신을 조각하였다. 이곳은 세 종교가 서로 파괴하지 않고 함께 있어 인도인의 관용 정신을 보여준다. 돌에 새겨진 인류의 높은 정신을 더듬으며 차분하고 경건해졌다.

어느 한산한 석굴 안에서 한 동양인 부부를 만났다. 혹시 한국인인가 하는 반가운 마음에 인사하니 환하게 웃으며 화답하는데, 대만 분들이셨다. 함께 석굴을 돌아보다 순간 배낭여행자의 매뉴얼이 떠올랐다. 뜨거운 햇살 아래 시내로 돌아갈 것이 문제였는데, 택시를 함께 타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지천명쯤 되어 보이는 부부는 잠시 눈을 마주치더니 그러자고 했다. 우선 점심부터 먹기로 하였다.

아저씨는 `순라이'라고 했다. 어느 나라 말인지 알아듣지 못했는데, 불교 성지 `순례자'로 이미 5번 인도에 순례하였고, 부인과 동행하여 온 건 처음이라고 설명해 주었다. 능숙하게 대화를 이끌어 가는 아저씨와 웃음으로 공감해주는 아주머니 덕분에, 나는 어느새 서툰 영어로 숙소의 열악한 상황과 설사로 생수와 삶은 달걀만 먹은 것을 어린애처럼 하소연하고 있었다. 두 분은 고기는 물론이고 마늘과 양파도 먹지 않는 불교식 채식주의자였다. 나는 치킨 볶음면을 먹으며 오랜만에 종알종알 수다를 떨다 보니 여행의 긴장이 스르르 풀렸다.

그런데 점심을 얻어먹은 것 외에 뜻밖의 호사를 하게 되었다. 부부는 지프를 전세 내어 여행하고 있었다. 차비를 아끼려던 내 속셈이 무색했지만 특별한 체험에 대한 기대와 두 분의 호의를 거절할 수 없는 분위기에 민망함은 접어두고 기꺼이 동행하였다. 일정의 마지막은 운전사의 가정을 방문하는 것이었다. 좁은 골목을 지나 들어간 작은 집은 우리 집 방 하나 정도의 공간이 전부였다. 부인과 어린 딸아이가 수줍게 차를 내왔다. 침실과 주방은 낮은 칸막이로 구분되어 있고 살림살이는 깔끔하여 주인의 성실함과 가정의 건실함을 느낄 수 있었다.

그동안 보아온 인도의 가난과 성근 사회시스템은 겉으로 드러난 단면일 뿐이란 것을 새삼 생각하게 되었다. 부부의 숙소에도 방문했는데, 내 숙소의 40배 가격이었고 깨끗하고 우아한 곳이었다. 배낭여행을 기준으로 다닌 나는 그 수준에서 인도를 보고 있었다. 긴장되고 경직된 눈으로 사람을 보고 있었다.

부부는 오랫동안 함께 해 주었다. 그날 밤 나는 야간 기차를 탈 예정이었는데, 역 근처에 있는 식당에서 피자를 사주겠다고 낮부터 얘기했었다. 극구 사양했지만, 그분들을 만난 순간부터 마지막까지 나는 피자를 좋아할 만한 어린아이였고 실제로 모든 것을 받기만 한 어린애였다.

고기와 양파를 골라내고 별거 없는 피자를 드시던 두 분, 기차를 타는 것까지 봐야 안심하겠다며 시종 여유 있는 웃음으로 함께 기다려 주며 혼자 하는 여행을 걱정해 주시던 모습이 10년이 넘도록 눈에 선하다. 우연한 인연으로 받은 조건 없는 사랑과 배려는 여행의 추억을 들출 때마다 감동과 그리움과 함께 내가 세상에 빚진 자임을 되새기게 한다.

그런데 세상에 빚진 것이 어디 그뿐이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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