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저리주저리(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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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강대헌 <에세이스트>
  • 승인 2016.03.03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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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대헌의 소품문 (小品文)
▲ 강대헌

“이 세상은 오해 때문에 돌아간다”라고 보들레르가 말했어요. 아하,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여하튼 오해받기를 원하는 사람은 적을 거예요.

어떤 분의 시집을 만나다가 해통득오(解痛得悟)라는 말을 쓴 해설을 들었어요. 고통을 견디어내면서 어떤 깨달음을 얻게 된 것이 시로 옮겨졌다는 소리인데, 삶과 시가 서로 피가 흐르는 관계가 돼야 한다는 뜻이니 무상대법(無上大法)처럼 여겨지기도 하더군요.

다니는 직장의 최고책임자가 회의 자리에서 “혼자 꿈을 꾸면 몽상(夢想)이 되지만, 여럿이 함께 꿈을 꾸면 현실이 된다”는 말을 전했어요. 뭔가 끈끈한 협업의 형태, 요즘 유행하는 말로 집단지성(集團知性)의 적용을 바랐던 겁니다. 시의적절한 요청인 거죠.

전설의 고수로 불리는 기타리스트 이중산이 연주하는 ‘슬로우 블루스(Slow Blues)’라는 노래를 유튜브로 시청했어요. 노래 제목은 아직 정해지지 않은 건데, ‘늑대 울음’이나 ‘늑대 어거지’ 정도로 생각하면 될 것 같다는 그의 말이 참 위트가 넘치더군요. 그의 기타는 어땠을까요? 궁금하면 오백원이랍니다.

노래 얘기 나온 김에 하나 더 덧붙이고 싶어요. 들국화의 보컬 전인권이 돌아가신 어머니를 그리며 썼던 가사가 남다르게 다가오는 ‘사랑한 후엷라는 노래예요. 다 옮겨볼 테니 한 편의 시를 읽는 기분으로 마주해 보세요. 그럼 시작할게요.

‘긴 하루 지나고 언덕 저편에/빨간 석양이 물들어 가면/놀던 아이들은 아무 걱정없이/집으로 하나둘씩 돌아가는데/나는 왜 여기 서 있나/저 석양은 나를 깨우고/ 밤이 내 앞에 다시 다가오는데//이제 잊어야만 하는 내 아픈 기억이/별이 되어 반짝이며 나를 흔드네/저기 철길 위를 달리는 기차에/커다란 울음으로도 달랠 수 없어/나는 왜 여기 서 있나/오늘 밤엔 수많은 별이/기억들이 내 앞에 춤을 추는데//어디서 왔는지/내 머리 위로 작은 새 한 마리 날아가네/어느새 밝아 온 새벽하늘이/다른 하루를 재촉하는데/종소리는 맑게 퍼지고/저 불빛을 누굴 위한 걸까/새벽이 내 앞에 다시 설레이는데.’

놀던 아이들과 빨간 석양과 반짝이는 별과 달리는 기차와 작은 새 한 마리와 새벽하늘이 던졌던 ‘나는 왜 여기 서 있나’라는 물음이 메아리처럼 울려 퍼지네요.

왠지 가톨릭신학교의 일상이 궁금했었는데, 얼마 전에 몇 가지를 알게 됐답니다. ‘대침묵(Great Silence)’이란 일정이 있어서 하루의 절반씩을 말을 하지 않고 지낸다는 것과 날마다 15분씩을 ‘양심 성찰’의 시간으로 보낸다는 것이었어요. 보통 침묵도 아닌 커다란 침묵이란 것도 대단했지만, 옳고 그름을 구별하는 마음씨를 못박고 돌아본다는 것도 놀라웠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작년 이맘때 내놓았다는 양심을 다루는 몇 가지 물음들이 성큼 다가오더군요.

“신을 필요할 때만 찾는가?(Do I only turn to God when I‘m in need?)”, “질투하고, 화를 잘 내고, 편견을 가졌는가?(Am I envious, hot-tempered, biased?)”, “타인에게 정직하며 공평한가?(Am I honest and fair with everyone?)”, “생명을 소중하게 여기는가?(Have I snuffed out the gift of life?)”, “자연 환경을 존중하는가?(Do I respect the environment?)”, “시간을 어떻게 사용하는가? 게으르지 않는가?(How do I use my time? Am I lazy?)“, “온유하고, 겸손하며 평화를 위해 일하는가?(Am I meek, humble and a builder of peace?)”. 제 주변에 대해 주저리주저리 늘어놓을게요. 당분간요.

/에세이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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