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평을 유지해온 물, 제천의림지(1)
수평을 유지해온 물, 제천의림지(1)
  • 여은희<제천시문화관광해설사>
  • 승인 2016.02.14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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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해설사에게 듣는 역사이야기
▲ 여은희

사람이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것. 혹은 생명을 연장하고자 가장 우선으로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바로 물이다. 우리의 생명은 작은 물방울에서 시작되었고, 풍요의 대본이었던 옛 사람들에게는 신앙의 대상이 되기도 했던 물.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수리시설로 최고(最古)의 물로 상징되는 제천의 의림지는『의림지와 제림(堤林)』으로 2006년 12월 명승 20호로 지정되었다. 제천의 지명은 고구려 때는 내토현(奈吐縣), 신라(757) 내제군(奈提郡), 고려(992) 제주(堤州), 조선(1413) 제천현(堤川縣)으로 불리다가 현재에 이르고 있는데 이는 모두 의림지에서 연원 된 것으로 의림지는 제천의 근간이라 해도 지나침이 없다고 할 것이다. 충청도를 『호서지방』이라고 일컫는 것 또한 의림지를 중심에 두는 말이다.

의림지는 여러 가지 축조설이 있는데, 삼한시대 축조설은 이병도의 『한국수전의 기원』에서, 그리고 신라 우륵 축조설은 구비전승된 설화와 우륵에 관한 정자나 샘물에서 유추되었다. 또한 조선 성종실록의 ‘의림지는 전조에 쌓은 것’이라는 기록으로 고려시대 축조설도 있음을 알 수 있다. 후에 세종 때 현감 박의림의 축조설과 세조 때 정인지 축조설 등 다양한 견해들이 많이 있으나 어느 것이 정확하다고 확정 지을 수는 없다.

제천시에서는 2009년 실증현장조사 중심으로 한국자원연구원에서 심층적인 연구조사 종합결과, 의림지는 오래전 용두산에서 유입된 물과 자체용출수로 이미 자연적 호수로 형성되어 오다가 삼한시대에 제방체가 초축된 후 서기 800년경에 증축된 것으로 판명되어 의림지의 축조 나이는 최고 1920년으로 보게 되었다.

의림지의 역사성은 제방축조방식에서도 알 수 있다. 점토와 나뭇잎, 풀 등 본초류 또는 말목을 번갈아 여러 층위 이상 쌓아 올리는 부엽공법이 바로 그것이다. 이것은 중국 전국시대 초나라 안휘성에서 시작되어 우리나라의 성이나 제언을 수축할 때 널리 이용되며 서울 풍납토성의 축조나 김제 벽골제의 축조에도 원용되었음이 확인된 바 있다.

의림지는 그 역사와 더불어 빼어난 아름다움까지 더하여 제방과 주변에 진섭헌, 임소정, 호월정, 청폭정, 우륵대 등 많은 정자와 누대가 있었으나 지금은 영호정(映湖亭)과 경호루만이 남아 아쉬움을 더하고 있다. 이곳을 방문했던 많은 시인 묵객들의 그림이나 글은 지금도 남아 옛 정취를 돌아보게 하는 자료가 되고 있다.

타지역에는 없는 저수지로서의 의림지 매력은 바로 산곡형 저수지로 과학적인 여수로(餘水路)와 여수토(餘水吐)라고 할 수 있다. 용두산에서 흘러내린 물이 목교 아래 여수로를 통해 의림지로 들어간다. 여수로의 낮은 물넘이는 부유물이 들어가지 못하게 하며, 저장된 물이 밖으로 나가는 것을 막아주는 역할을 한다. 의림지에 가득 저장이 되고 남은 물은 여수토를 통해 흘러가게 되는데 바로 천혜의 용추폭포가 그 기능을 담당하며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또한, 세종실록에 『낮은 산줄기 사이를 흐르는 작은 계곡을 막은 제방은 길이가 530척(尺)이며, 수위는 제방 밖의 농경지보다 매우 높아서 관개면적이 400결(結)이나 되었다. 못의 둘레는 5,805척이나 되고 수심은 너무 깊어서 잴 수 없다고 하였다. 상주의 공검지(恭儉池)나 밀양의 수산제(守山堤), 김제의 벽골제(碧骨堤)와 같은 시기의 것이지만 제방의 크기에 비해 몽리면적이 큰 것은 제방을 쌓은 위치의 수위가 높기 때문이다.』는 기록이 있다. 이처럼 의림지는 산곡형 저수지로 적은 면적을 차지하면서 많은 수량을 확보하여 타지역 저수지보다 넓은 몽리면적을 유지하는 살아있는 저수지였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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