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날의 추억
설날의 추억
  • 박상일<청주문화원 수석부원장>
  • 승인 2016.02.04 1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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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 박상일

어느새 설날이 가까워졌다. 실제로는 금요일인 오늘부터 시작이다. 주말과 대체공휴일까지 합쳐 5일간을 쉬다 보니 민족 최대의 명절이라는 의미보다 황금의 연휴로 인식하는 사람들이 많아 보인다. 설은 한 해의 시작인 음력 정월 초하루를 일컫는 말로 설날이라는 함은 ‘설이 되는 날’이므로 정확히 말하면 설이라 해야 맞다. 설은 새해 새달의 첫날이면서 동시에 한 해의 첫 명절이라는 의미가 있다. 설날을 원일(元日)·원단(元旦)·원정(元正)·원신(元新)·원조(元朝)·정조(正朝)·세수(歲首)·세초(歲初)·연두(年頭)·연수(年首)·연시(年始)라고도 하는데 모두 한 해의 첫날임을 뜻한다.

한편 설이란 용어를 나이를 헤아리는 말로 해석하기도 한다. 해가 바뀌어 새로운 한 해를 맞이하는 첫 날인 ‘설’을 쇨 때마다 한 살씩 더 먹는다. 설을 한 번 쇠면 1년이며 두 번 쇠면 2년이 되는 이치를 따라 사람의 나이도 한 살씩 더 늘어난다. 결국 ‘설’이 사람의 나이를 헤아리는 단위로 정착하여 오늘날 ‘살’로 바뀌게 된 것이라 한다. 이밖에도 설이 새해 첫 달의 첫날, 그래서 아직 낯설기 때문에 ‘설다’, ‘낯설다’ 등에서 유래했다는 주장도 있다.

우리나라가 태양력을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1894년 갑오경장 때이다. 당시 김홍집이 중심이 된 개화당 내각에 의해 1895년 음력 11월 17일을 양력 1896년(건양1) 1월 1일이라고 고종황제의 칙명으로 선언했다. 나라에서 쓰는 연호도 양력을 세운다는 뜻의 건양(建陽)이라고 고치었으니 입춘의 춘련에 쓰는 건양다경(建陽多慶)의 그 건양이다. 양력을 사용하기 시작한 후에도 우리의 전통명절인 설날은 이어졌지만 일제강점기가 되면서 수난의 역사가 시작됐다. 일본은 우리의 전통문화를 말살하고자 설날과 같은 세시명절마저 억압했다. 그들은 우리 명절 무렵이면 떡방앗간을 폐쇄하고 새 옷을 입고 나오는 어린이들에게 먹칠하는 사례가 허다했다. 반면에 일본의 명절과 의식을 한국에 이식하여 강요했다. 일본 명절인 천장절(天長節)·명치절(明治節)·기원절(紀元節) 등을 국경일로 정해 갖가지 행사에 한국인을 참가시켰다. 또한 그들의 명절인 신정에는 일본식 금줄인 시메나와(標繩)을 대문에 달게 하고 단오절에는 고이노보리(鯉幟)라 하여 헝겊으로 잉어를 만들어 풍선처럼 띄우게 했다.

일제강점기에 양력과세를 강요당한데 이어 광복 후에도 설날의 수난은 계속되었다. 우리의 전통적인 ‘설날’은 구정(舊正)이라 하고 양력 1월 1일을 신정(新正)이라 하여 이중과세를 하였는가 하면 한동안은 아예 신정만을 공휴일로 하고 설날은 무시되었다. 국제적으로 신정이 통용되기 때문에 우리도 그때에 맞추어서 쉬고 ‘구정’ 때는 외국에서는 모두 일을 하므로 우리 역시 함께 해야 한다는 모순된 논리였다. 이처럼 설날은 공휴일 또는 비공휴일 문제로 오락가락하다가 1985년에는 명칭조차 애매한 ‘민속의 날’로 지정되어 단 하루를 공휴일로 정했는데 이후에도 논란은 그치지 않다가 1989년 음력 정월 초하루부터 본명인 ‘설날’을 찾게 되었다. 그리고 신정도 한동안 3일 연휴로 하다가 2일로 줄이고, 다시 1999년 1월 1일부터 하루의 휴일로 축소되어 3일 연휴인 설날의 의미가 상대적으로 커졌다. 게다가 재작년부터인가 대체공휴일까지 생겼으니 한가위와 함께 설날이 민족 최대의 명절임이 실감 난다. 아하! 그런데 설 연휴기간에 130만명이 인천공항을 통해 해외로 나갈 것이라고 하니 민족 최대의 명절이 이제는 민족 최대의 여행 절이 되는가보다. 설날부터 보름날까지 이어지던 세배꾼의 행렬은 잊혀진지 오래고 연날리기 팽이치기 제기차기도 이제 추억 속에서 멀어져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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