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정치는 늘 대한민국 중심에 있었다
충북정치는 늘 대한민국 중심에 있었다
  • 엄경철 기자
  • 승인 2015.08.12 19:3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충북인의 광복 70년 <정관계-1>
1945년 8월 15일 광복이후 대한민국은 많은 시련 속에 산업발전을 이뤄 오늘에 이르렀다. 근대와 현대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던 국내 정치는 많은 역사적 인물을 만들어냈다. 해방이후 정치는 국가발전 선봉자를 자임했지만 부정부패, 사회혼란의 근원이 되기도 했다. 근대와 현대로 이어지는 역사의 격량 속에서 많은 정치인들이 정국을 주도하다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충북은 해방이후 대한민국 정치사에 남을 만한 인물들을 많이 배출했다. 비록 도세가 약하기는 했으나 어떤 시기에는 정국을 좌지우지하는 막강 정치력을 발휘한 때도 있었다. 때로는 정치변방으로 전락해 존재감이 없었던 시기도 있었지만 충북의 정치는 늘 대한민국 정치의 중심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1952년 지자체 시행 … 시·도·읍·면 의원 첫 선출

8대 민주공화당 독식 불구 최병길 4전 5기 당선

이용희 18대 선거까지 6선 기록 … 국회부의장도

신경식 청주권서 유일 4선 … 화합형 정치인 유명

노영민·오제세·변재일·정우택 등 내년 4선 도전

 

# 제헌국회의원선거, 국회의원선거

1948년 5월 10일 제헌국회의원선거가 실시됐다. 충북에서는 12개 선거구에서 12명을 선출했다. 선거과정에서 입법의원을 지낸 김영규 후보가 괴산지역 국회의원에 출마했다가 피살됐다.

정부수립 후 1952년 지방자치제 시행에 따른 지방의회 의원선거가 실시됐다. 6·25전쟁 중이던 1952년 4월 25일 실시된 지방의회선거에서 시·도·읍·면의회 의원과 도의회 의원을 처음 뽑았다. 초대 충북도의회 도의원은 28명이 선출됐다. 초대의장은 최동선(청주시), 부의장은 권복인(옥천군)이 당선됐다.

1958년 5월 2일 실시된 제4대 국회의원선거에서 충북은 13명이 당선됐다. 4대 선거에서 청주는 야성이 강한 지역으로 부각됐다. 청주시 지방의원 출신이 야당 후보로 출마해 집권당 후보인 전직 도지사를 꺾어 파란을 일으켰다. 당시 민주당 후보였던 이민우 후보가 집권당인 자유당 공천을 받은 전직 충북도지사 출신 이명구 후보에 이겼다. 이후 이 전 총재는 5, 7, 9, 10, 12대까지 여섯 번이나 국회에 진출하게 된다. 이 전 총재는 1985년 2·12 총선에서 ‘정치 1번지’ 서울 종로-중구에 출마해 신민당 돌풍을 일으켰다. 1987년 신민당 총재를 지냈다. 그러나 5공화국 말기인 1986년 12월 24일 전두환 정권과의 타협을 전제로 내각제 개헌을 받겠다는 이른바 ‘이민우 구상’ 발표 파문으로 신민당이 사실상 와해되자 정계에서 은퇴했다.

4대 선거에서는 정운갑 전 의원(자유당)이 진천군에서 당선, 5선 의원을 향한 첫 걸음을 내디뎠다. 1967년부터 1978년까지 제7~10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1979년 신민당 총재직무대행을 역임했다.

# 4·19 이후 민의원·참의원선거

1960년 4·19혁명의 도화선이 됐던 부정선거 당사자인 이기붕은 충북 괴산 청천면 출신이다. 이승만 정권의 2인자였던 이기붕은 1896년 충북 괴산군 청천면 후평리에서 태어났다. 1898년 서울로 이주한 것으로 알려졌다.

1960년 7월 29일 민의원(民議員)과 참의원(參議員)을 뽑는 선거가 실시됐다. 민의원선거에서 이민우 전 총재를 비롯해 13명이 선출됐다. 참의원은 민주당의 박기운, 작찬희, 송필만 후보가 당선됐다. 자유당은 전국적인 패배에도 오범석 후보(충청학원 설립자)가 당선자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 5·16 이후 충북의 정치거물들

5·16 이후 군사정권하에서 1963년 민주공화당이 탄생했다. 창당 후 처음 치른 제6대 국회의원선거에서는 정태성, 육인수 등 지역구와 전국구 국회의원 10명을 배출했다. 당시 충북은 민주공화당이 독식했다.

충북의 8대 국회의원선거는 민주공화당 독식을 종식시켰다. 민주공화당 6석, 신민당 2석의 결과가 나왔다. 당시 청주시에서 신민당 최병길 후보가 4전5기의 주인공이 됐다. 최 후보는 3대 국회의원선거 때부터 낙선의 고배를 마시다가 다섯 번째에서 당선됐다. 최 후보는 집권여당인 민주공화당 중진의원 출신인 정태성 후보를 따돌리고 당선돼 화제가 됐다.

1978년의 제10 국회의원선거에서는 초선의 오용운 전 의원이 진천·음성에 출마해 5선의 야당거물 이충환을 제치고 1위를 차지하는 파란을 일으켰다. 군인 출신에서 정치인으로 변신한 오 전 의원은 3선 국회의원을 지냈다. 그러나 80년대말 리비아 KAL기 추락사고로 외아들을 잃고, 1991년 ‘수서비리사건’으로 구속되는 등 비운의 정치인이 됐다.

11대 국회의원선거에서는 1980년대 한국정치를 주름잡았던 충북 출신 정치인들이 대거 입문했다. 1958년 정치에 입문한 야당 정치인 이민우 의원이 또다시 당선됐다. 정종택, 김종호, 이춘구 등이 당시 국회의원 당선자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이때부터 이들 충북 출신 정치인들은 중앙정치 무대에서 활약하기 시작했다. 정종택, 김종호, 이춘구 등은 장관 등 국무위원까지 기용됐다.

제천 출신 이춘구 전 의원은 육사 14기 하나회 출신이다. 국보위 시절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사회정화위원장, 민정당 사무총장을 지냈다. ‘저승사자’라는 별명처럼 강직한 성품의 이 의원은 동생의 청탁도 거절할 정도로 공(公)과 사(私)가 분명한 청렴의 상징이었다.

김종호는 6선, 이춘구는 4선, 정종택은 3선 의원이다. 김정호, 이춘구는 육사출신 정치인이자 장관까지 지낸 공무원이기도 하다.

1984년 실시된 12대 국회의원선거에서는 박준병이 남부3군(보은옥천영동)에서 출마해 당선됐다. 박준병은 전두환 전 대통령의 소집명령으로 군 생활을 마감하고 민정당 후보로 정계에 입문했다. 3선 국회의원이지만 5·18재판 등에서 곤혹을 치렀다. 박준병과 같은 지역구에서 이용희도 당선됐다. 신민당 소속이었던 이용희는 1973년 국회의원 당선이후 3번째였다. 지난 18대 국회의원선거까지 이용희는 6선을 기록했다. 야당 외길을 걸어오면서 국회부의장까지 지낸 충북의 대표적인 야당 정치인이다.

옛 청원군 출신의 신경식 헌정회장은 청주권에서 유일하게 4선 국회의원을 지낸 인물이다. 1988년 실시된 제13대 국회의원을 통해 정계에 입문했다. 16대 총선까지 연속 당선된 신 회장의 4선 기록은 아직 청주권에서 깨지지 않고 있다. 여야를 막론하고 호평을 받았던 화합형 정치인이었던 신 회장은 김영삼 총재 비서실장 등 비서실장만 여섯번을 맡았다.

홍재형 전 의원은 지난 2004년 제16대 국회의원에 당선되면서 3선을 기록했다. 경제부총리 출신의 홍 전 의원은 2011년 제19대 총선에서 새누리당 정우택 의원에 패하고 정계를 은퇴했다. 홍 전 의원의 4선 도전을 좌절시킨 정우택 의원은 내년 4월 총선에서 4선에 도전한다. 정운갑 전 의원의 아들인 정 의원은 여야를 넘나들며 해양수산부장관과 충북도지사를 지내는 등 화려한 정치경력을 과시하고 있다.

2004년 대통령 탄핵바람이 거세게 부는 와중에 치러진 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충북은 열린우리당이 8석을 싹쓸이했다. 당시 열린우리당의 완승으로 노영민·오제세·변재일 의원(새정치민주연합)이 배지를 달았다. 내년 4월 총선에서 새정치민주연합 소속으로 이들 의원 모두 4선에 도전한다.

16대 총선에서 싹쓸이 당한 한나라당이 4년 후에 치러진 17대 총선에서 설욕전을 폈으나 송광호 의원(제천단양)만 당선됐다. 3선을 달성한 송 의원은 당시 충청지역에서 유일한 여당 당선자였다. 4선 도전을 눈앞에 두고 송 의원은 현재 뇌물수수 혐의로 구속, 재판중에 있어 내년 총선 출마가 불투명하다.

▲ 1960년 7월 22일 선거유세장 장면.
▲ 1960년 3·15 부정선거 충북 지역 투표장 모습.
▲ 1969년 실시된 국민투표 청주 대성동 투표장에서 정해식 15대 충북지사 부부가 투표를 하고 있다.
▲ 2000년 4월 실시된 국회의원 투표 장면

/엄경철기자  eomkc@cctimes.kr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