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후 태동 충북체육 종목별 눈부신 성장
광복후 태동 충북체육 종목별 눈부신 성장
  • 하성진 기자
  • 승인 2015.08.12 17:2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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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인의 광복 70년 -체육계

1945년 전국대회 첫 출전 … 백형기 육상 우승

레슬링 곽동윤 · 복싱 김성기 등 경기보급 앞장

1975년 충북체육회관 건립… 박정희 휘호 받아

88올림픽  김수녕·지용석 등 환영카퍼레이드

광복 이후 1950년까지는 충북체육의 초창기이자 격동기다. 충북체육발전을 위한 초석을 다진 정비기이기도 하다.

1945년 10월 27일부터 서울운동장에서 조선체육회 주최로 자유해방 경축 전국종합 경기대회라는 이름의 제26회 전국체전이 열렸다. 충북은 처음으로 대표단을 출전시켜 육상경기 남자부에서 백형기가 100m우승을 차지했다.

이듬해 충북체육회가 정식으로 조직되면서 경기보급이 활발해졌다.

충북 출신 체육인들이 귀향하면서 향토 체육 육성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레슬링의 곽동윤을 비롯해 김성기(복싱), 김영진(정구), 허광(축구), 이만수(씨름), 김창성·전만식(유도), 채동환(탁구), 이상덕(역도) 등 체육인들이 경기보급에 공을 들였다.

투기 종목은 선각자 체육인들이 개인재산을 털어 창고나 사설체육관을 운영하며 온 열정을 바쳤다.

청주복싱구락부(김성기 1945~1971년), 청주역도관(이상덕 1946~1970), 레슬링 도장(곽동윤 1945~1971년), 청주경찰서 상무관, 청도관 등이 대표적이다.

충북의 복싱은 1941년 제8회 전조선복싱선수권대회 우승자인 고 김성기 선생에 의해 보급됐다.

김 선생은 해방과 더불어 청주경찰서 무술경위로 위촉돼 경찰관과 열차 승무원, 은행 경비원 등을 대상으로 복싱을 전파했다.

복싱 관심도가 높아지자 1951년 청주시 수동 옛 청주역 뒤편에 가건물을 지어 청주체육관을 설립하고 선수 육성을 시작했다.

김 선생의 요청으로 전상하 충북복싱경기연맹 고문의 선친(청주대마공장 과장)이 링을 만들었다.

그 후 김 선생의 노령으로 체육관이 폐쇄되자 제자인 고 전재완 서원대 교수가 69년 청주복싱구락부를 새롭게 개관, 후진들을 양성했다.

고난과 역경을 이기고 노력 끝에 홍기호(1982년 뉴델리아시안게임 금메달)와 홍성식(1992년 바르셀로나올림픽 동메달) 등 21명의 국가대표를 배출했다.

충북 복싱은 김 선생을 비롯해 이병록·정태완·강기일·서갑수 등 역대회장과 권영배 명예회장 등의 노력으로 발전을 거듭해왔다.

태권도도 복싱 못지않은 역사를 갖고 있다. 충북의 태권도는 정만순 국기원장의 친형 정갑순 회장과 청도관을 빼놓을 수 없다.

정 회장은 석교동의 철공소, 남주동 우시장 공터 등을 돌며 청도관을 운영하다가 1971년 3월 서문동에 사비를 들여 새로 건립했다.

정 회장 형제는 선수들을 지도해 제2회 전국스포츠소년대회 출전, 금·은·동메달 각 1개씩을 따내며 5위에 올랐다.

1978년 정 회장은 42세의 젊은 나이에 작고했다. 태권도협회는 정 회장의 공을 기리기 위해 매년 고 정갑순회장배 추모대회를 열고 있다.

정 원장은 1970년 11월 중미 엘살바도르에 국제사범으로 파견돼 2년간 육군사관학교와 경찰학교, 군장교, 경호실 등을 지도하면서 한국의 태권도를 전 세계에 알렸다.

1969년 박정희 전 대통령이 충북 유세를 마치고 귀경하던 중 충북 사람은 박수가 인색하다고 말했다고 한다. 육영수 여사의 오빠인 육인수 당시 국회 문공위원장은 김준철 공화당 충북도당 부위원장 겸 충북체육회 부회장에게 체육을 통한 인식변화를 주문했다.

체육회 쇄신에 나선 김 전 부회장은 서울대 체육과 출신의 최동식씨를 체육회 사무국장으로 영입했다.

1970년 들어 충북체육회관 건립이 진행됐다. 1973년 11월 청와대에서 최동식 체육회 사무국장(1971~1975년)을 불렀다.

민정비서실 정종택 비서관(전 충북지사)이 최 국장을 반갑게 맞이했다. 건립예산이 1억원이다 보니 지원이 사실상 불가능할 것으로 예측했지만 놀랍게도 박 대통령의 재가가 났다.

2년간의 공사를 마무리하면서 박 전 대통령이 직접 쓴 ‘충북체육관’ 휘호를 받았다.

1977년 부산 화랑기대회에서 세광고는 23년 만에 한 많은 우승의 꿈을 달성했다.

당시 야구부장은 1973년 체육교사로 부임한 김선필 전 충북체육회 사무처장이다. 이후 1980년 대붕기 우승, 1982년 황금사자기 첫 우승을 차지했다.

1980년대 들어서면서 전국체전 만년 하위권 성적으로 이어졌으나, 소년체전 주역들의 고교 및 대학 진학, 지도자 배출에 따라 도약의 가능성을 열어뒀다. 20여개 실업팀 창단, 남궁유도회관 준공 등이 이뤄졌다.

1978년 9월 1일 청주체육관에서 제6회 전국중고유도연맹전이 열리는 날 고 남궁윤 회장이 정종택 지사와 최태하 시장에게 “용지만 마련되면 회관을 건립하겠다”고 요청하면서 남궁유도회관이 설립됐다.

1988년 서울올림픽을 빛낸 충북의 금메달리스트인 김수녕(양궁), 지용석(태권도) 등이 고향땅을 밟는 날 청주시내 한복판에서 대대적인 카퍼레이드가 연출됐다.

충북은 이후 2004년 전국체전을 기점으로 충북스포츠센터를 비롯해 충북학생수영장, 제천 하키장 준공과 카누장, 요트장 등 전 종목 시설이 대폭 완비됐다.

올해 초 공무원 출신의 홍승원 전 도체육회 사무처장 후임으로 송석중 총무관리팀장이 발탁됐다.

송 사무처장은 초·중·고교와 대학 시절 태권도 도 대표 선수로 활동했다. 대한태권도협회 공인 심판과 국기원 태권도협회 심사위원으로 활동한 체육인이다.

내부승진을 통해 체육계 인사가 사무처장 자리에 오른 것은 유경철 전 사무처장(2009년 1월∼2011년 3월) 이후 4년 만이다.

/하성진기자

seongjin98@cctime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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