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바람 앞에서
다시 바람 앞에서
  • 김기원 <시인·문화비평가>
  • 승인 2014.10.15 1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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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원의 목요편지
김기원 <시인·문화비평가>

바람 없는 삶이 무슨 의미 있으랴. 바람 없는 깃발과 바람개비가 무슨 소용 있으랴.

바람개비도 바람이 불어야 돌고, 깃발도 바람이 불어야 펄럭인다. 인생도 저와 같아서 바람에 흔들리면서 성숙하고 단단해지는 거다. 

바람이 적당히 불면 바람개비도 신나게 돌고, 깃발도 멋지게 펄럭이지만, 광풍은 깃발을 통째로 날려버리기도 하고, 갈기갈기 찢어놓기도 한다.

이처럼 바람은 존재의 동력이자, 고통의 원천이기도 하다.

바람이라고 다 같은 바람이 아니다. 

시원한 바람 뜨거운 바람 고마운 바람 미운 바람이 있는가 하면, 원하는 바람 원치 않는 바람이 있다. 

여름날 산이나 강에서 불어오는 시원하고 상쾌한 바람이 있듯이, 에어컨 실외기에서 나오는 뜨겁고 불쾌한 바람도 있다. 

어디 그뿐이랴.

여름에 부는 바람은 더위에 지친 생명들에게 청량제가 되지만, 겨울에 부는 바람은 생명들에게 살을 에는 고통을 준다. 순풍은 배를 순항하게 하지만 태풍은 배를 전복시키기도 하니, 바람이라고 다 같은 바람이 아닌 것이다. 

살다보면 바람 불어 좋은 날이 있고, 바람 불어 싫은 날이 있다. 

그러나 이는 마음먹기 나름이다. 북풍한설도 나를 위해 분다면 좋은 날이 될 터이고, 시원한 동남풍도 남을 위해 불면 싫은 날이 된다. 

이런 바람도 있다. 

선거 때가 되면 등장하는 고약한 바람. 이름하여 북풍, 안풍, 세풍, 핫바지풍, 세월호풍이라는 참으로 요상한 바람이 진원지를 숨긴 채 마구 불어온다. 

여당에 유리하게 작용하기도 하고 야당에게 유리하게 작용하기도 하는, 회오리바람처럼 생성되었다가 선거가 끝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사라지고 마는, 인위적인 바람이 있다. 

세상에는 치맛바람이라는 이상야릇한 바람도 있다. 

여인네들이 자신의 이익추구와 존재감 과시를 위해 극성스럽게 활동하는 바람을 이르는데, 그런 치맛바람이 지나고 나면 악취가 난다. 

사람들은 저마다 바람으로 살고, 바람과 함께 사라진다. 

싫든 곱든 저마다 질풍노도의 시기를 보내고 성숙해 간다.

저마다 사랑에 미치고, 출세에 미쳐 산다. 한때 문학에, 골프에, 허명에 미쳐있었다. 지나고 보니 모두 바람이었다. 하늬바람 높새바람이었고, 편서풍이자 무역풍이었다.

바람은 유혹이다.

바람이 불면 흔들리는 사람이 있고, 바람 불어도 까닥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 표리부동한 자는 흔들릴 것이고, 신념이 강한 자는 눈썹하나 까닥하지 않을 것이다.

설사 몸은 바람에 흔들릴지언정 유혹에 흔들리지 않는 한결같은 사람이 있다. 

바람은 생명이다. 

인생은 바람처럼 왔다가 바람처럼 사라져 간다. 그러므로 의미 있게 살아야 한다. 내일 죽어도 여한이 없을 그 무엇을 찾아야 한다. 

바람 앞에 촛불이 아니라, 등대 같은 사람이어야 한다.

어찌 보면 사람은 바람 앞에 촛불 같은 존재이다. 바람이 휙 하고 불면 힘없이 꺼지고 마는 촛불. 그러나 태풍과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도 의연하게 빛을 비추어 주는 등대와 같은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들로 인해 인류는 진화하고 문명은 발전한다.

바람이 분다.

일제 암흑기를 살았던 윤동주 시인은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고 노래했지만, 지금은 바람 앞에 대책 없이 괴로워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좋은 바람이면 기꺼이 즐기고, 나쁜 바람이라면 분연히 맞서 싸워야 한다. 

다시 바람이 인다.

순풍인지 역풍인지 알 수 없지만, 살아 있음으로, 바람은 늘 그렇게 그대를 향해 불어온다. 

비오니 오늘도 바람 불어 좋은 날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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