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고향 그곳에는
나의 고향 그곳에는
  • 충청타임즈 기자
  • 승인 2014.09.04 1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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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은 포근하다. 다정하다. 그리고 그리움이다. 고향은 과거가 있는 곳이요 정이 든 곳이며, 잊을 수 없는 곳이다. 스스로 고향에 돌아온 것이면 귀향(歸鄕)이요, 어쩔 수 없이 돌아온 것이면 낙향(落鄕)이다.

고향은 아름다운 과거이며 어머니 같은 정서적 안정을 주는 대상이다. 이웃도 모르는 도시, 각박한 인심, 급변하는 사회, 영악한 이해관계, 외국문물이 쏟아지는 사회 등으로부터 나를 어머니의 품처럼 따듯하고 포근하게 안아주는 곳이 고향이다. 장기적인 불황이 이어지는 가운데 올해는 특히 많은 대형 사건이 전국을 뒤흔들었다. 국민들의 심신이 극도로 피로감에 젖어 있다. 이 같은 시기에 민족 최대명절 추석이 다가왔다. 고향을 찾아 지친 몸과 마음을 다스려보자는 취지로 고향을 생각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아봤다.

◇ 나의 영원한 마음의 고향 어머니

김명철 충북교육과학硏 교육연구사

“내가 이래도 유학파 출신이야! 나 대학 나온 여자야!”

노인 대학을 다니시며 한글 행서를 붓글씨로 표구를 해 거실에 걸어 놓기까지 하셨다. 최근에는 영어도 배우셔서 아침에 전화를 드리면 “굿모닝, 해브나이스데이”를 연발하시는 할머니가 바로 나의 어머니이다.

추석이 되면 가슴 저미게 더 그립고 애틋한 분이 어머니이다. 누구나 어머니를 생각하면 가슴이 먹먹해지고, 마음 가득 사랑의 감정이 북받쳐오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어머니는 생명의 근원이고 모든 사물의 시작을 상징하는 뜻으로 쓰이기도 한다. 어머니는 자녀를 위해 헌신하고 자애를 베푸신다. 때문에 인간관계에서의 너그럽고 인자함을 상징하는 뜻으로 쓰이기도 한다. 특히 우리나라 역사 속에 나타나는 어머니의 모습은 부드러우면서도 강하고 엄격하면서도 자애롭기가 끝이 없는 존재로 나온다.

어머니의 최종학력은 만주봉천소학교 2학년 중퇴이다. 소학교 2학년 여름방학 때 일제가 항복을 하면서 광복이 돼 고국으로 돌아오신 분이다. 최종학력이 만주봉천소학교 중퇴인데 남들에게는 유학파라고 허풍을 떨고 다니신다. 사실 중국에서 공부를 하셨으니 유학이 아니라고 말할 수는 없으니 거짓말은 아니다. 어머니는 한국에 돌아오신 후에는 더 이상 학교를 다닌 적이 없고 최근에 노인대학을 몇 군데 다니시면서 대학 나온 여자라고 자칭 유학파라고 큰 소리를 치신다.

어머니는 고향이 없다고 말씀하신다. 일제 강점기에 본인의 의사와는 전혀 상관없이 어린 시절 아버지를 따라서 만주로 떠나셨고 그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셨다. 가끔씩 독립군과 일본군에 대해서 말씀하시면서 지금의 일본에 대해 안타깝게 생각하신다. 당시 만주에서의 생활이 얼마나 고단했었는지에 대해 어린 시절이지만 넋두리 처럼 말씀하실 때는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난다. 그 시절 처절하게 어려웠던 기억은 당신의 애창곡 ‘여자의 일생’을 부르실 때는 애절함에 가슴을 치는 듯하다.

나는 35년 전에 낙동강이 유유히 흐르고 남해 바다가 가까이 보이는 고향 땅을 떠나 충청도로 이주해 이제는 충청도 사람보다 충청도를 더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자부하며 살고 있다. 그래서 나는 이은상이 지은 가곡 ‘가고파’를 좋아한다. 수업시간에도 곧잘 흥얼거리고 아이들이 졸거나 수업을 지루해하면 제법 감정을 잡고 불러주기도 하던 추억의 노래이다. 바다가 없는 충북에서 살면서 가장 그리운 고향은 바다이다. 푸르디 푸르고 넓디 넓은, 그리고 무한히 펼쳐진 수평선 위로 끝없는 펼쳐지는 광대한 이상!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바다는 영원한 나의 고향이고, 그리움의 근원이기에 바다가 있는 고향이 더욱 사무친다. 가고파를 부를 때면 나도 모르게 가슴이 사무치고 눈물이 흐른다. 나의 고향을 표현할 수 있는 수많은 수식에 가운데 내 마음을 후벼파는 듯 나의 심금을 울리고 있다.

이렇듯 마음속의 평안과 안식의 바탕이 바로 고향인 것이다. 그런데 과연 나의 어머니는 고향이 어디일까 인고의 세월을 이겨내고 이제는 돌아와 한송이 국화꽃 처럼 삶을 감사와 사랑으로 채워가시는 어머니의 넉넉함에 감사의 기도를 올린다. 그리고 내년 추석에는 어머니를 모시고 어머니의 안타까운 기억 너머에 있는 고향 만주 봉천(심양)을 다녀와야겠다.

◇ 보름달로 떴다 그믐으로 지는 우리네 삶

“내가 이래도 유학파 출신이야! 나 대학 나온 여자야!”노인 대학을 다니시며 한글 행서를 붓글씨로 표구를 해 거실에 걸어 놓기까지 하셨다. 최근에는 영어도 배우셔서 아침에 전화를 드리면 “굿모닝, 해브나이스데이”를 연발하시는 할머니가 바로 나의 어머니이다. 추석이 되면 가슴 저미게 더 그립고 애틋한 분이 어머니이다. 누구나 어머니를 생각하면 가슴이 먹먹해지고, 마음 가득 사랑의 감정이 북받쳐오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어머니는 생명의 근원이고 모든 사물의 시작을 상징하는 뜻으로 쓰이기도 한다. 어머니는 자녀를 위해 헌신하고 자애를 베푸신다. 때문에 인간관계에서의 너그럽고 인자함을 상징하는 뜻으로 쓰이기도 한다. 특히 우리나라 역사 속에 나타나는 어머니의 모습은 부드러우면서도 강하고 엄격하면서도 자애롭기가 끝이 없는 존재로 나온다.어머니의 최종학력은 만주봉천소학교 2학년 중퇴이다. 소학교 2학년 여름방학 때 일제가 항복을 하면서 광복이 돼 고국으로 돌아오신 분이다. 최종학력이 만주봉천소학교 중퇴인데 남들에게는 유학파라고 허풍을 떨고 다니신다. 사실 중국에서 공부를 하셨으니 유학이 아니라고 말할 수는 없으니 거짓말은 아니다. 어머니는 한국에 돌아오신 후에는 더 이상 학교를 다닌 적이 없고 최근에 노인대학을 몇 군데 다니시면서 대학 나온 여자라고 자칭 유학파라고 큰 소리를 치신다. 어머니는 고향이 없다고 말씀하신다. 일제 강점기에 본인의 의사와는 전혀 상관없이 어린 시절 아버지를 따라서 만주로 떠나셨고 그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셨다. 가끔씩 독립군과 일본군에 대해서 말씀하시면서 지금의 일본에 대해 안타깝게 생각하신다. 당시 만주에서의 생활이 얼마나 고단했었는지에 대해 어린 시절이지만 넋두리 처럼 말씀하실 때는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난다. 그 시절 처절하게 어려웠던 기억은 당신의 애창곡 ‘여자의 일생’을 부르실 때는 애절함에 가슴을 치는 듯하다.나는 35년 전에 낙동강이 유유히 흐르고 남해 바다가 가까이 보이는 고향 땅을 떠나 충청도로 이주해 이제는 충청도 사람보다 충청도를 더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자부하며 살고 있다. 그래서 나는 이은상이 지은 가곡 ‘가고파’를 좋아한다. 수업시간에도 곧잘 흥얼거리고 아이들이 졸거나 수업을 지루해하면 제법 감정을 잡고 불러주기도 하던 추억의 노래이다. 바다가 없는 충북에서 살면서 가장 그리운 고향은 바다이다. 푸르디 푸르고 넓디 넓은, 그리고 무한히 펼쳐진 수평선 위로 끝없는 펼쳐지는 광대한 이상!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바다는 영원한 나의 고향이고, 그리움의 근원이기에 바다가 있는 고향이 더욱 사무친다. 가고파를 부를 때면 나도 모르게 가슴이 사무치고 눈물이 흐른다. 나의 고향을 표현할 수 있는 수많은 수식에 가운데 내 마음을 후벼파는 듯 나의 심금을 울리고 있다.이렇듯 마음속의 평안과 안식의 바탕이 바로 고향인 것이다. 그런데 과연 나의 어머니는 고향이 어디일까 인고의 세월을 이겨내고 이제는 돌아와 한송이 국화꽃 처럼 삶을 감사와 사랑으로 채워가시는 어머니의 넉넉함에 감사의 기도를 올린다. 그리고 내년 추석에는 어머니를 모시고 어머니의 안타까운 기억 너머에 있는 고향 만주 봉천(심양)을 다녀와야겠다.

윤승범 시인

명절입니다. 누구는 고향을 찾기도 하고 가족들이 있는 곳을 향하기도 하지만 어디로도 갈 곳이 없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의 명절 아침은 초라합니다. 허술하게 차린 차례상의 허름한 음복(飮福) 두어 잔에 취해 외롭고 쓸쓸한 눈물을 흘리는 날이 오늘 같은 날입니다. 오래전에 돌아가신 제 아버님 이야기입니다. 당신은 전쟁 난리 때 짐 보따리를 매고 남으로 내려오셨습니다. 짊어지고 온 재산이 많았는지 아니면 권모와 술수가 뛰어났는지는 모르지만 남한 땅에 자리를 잡고 하신 일이 농지를 사 모아서 북에서처럼 다시 지주로 살아가는 일이었습니다.

일가붙이도 없고 아쉬울 것도 그다지 없으니 한갓진 날이면 당시에는 구하기 힘든 향 진한 양주 한 병 들고 강가에 나가 둘러 마시고 오거나 청요리시켜 놓고 ‘도꾸리’ 빼갈을 드시며 호시절을 누리곤 하셨습니다.

거기서 욕심이 족했다면 지금의 나도 조금은 다른 모습으로 살고 있겠지만 당신의 욕심이 조금 과했었나 봅니다. 눈먼 재산을 노린 사기꾼들이 접근을 했습니다. 사기꾼들이 말하기를 저기 어디쯤 숨겨진 돌산이 있는데 그걸 사서 개발을 하면 돌은 돌대로 팔고 산은 산대로 평야가 되니 부자가 되는 것은 쉽고도 당연한 일이라고 꼬드겼습니다. 잘 사는 그때보다 더 잘 살고 싶은 마음에 당신께서는 쌀 많이 나오는 농지를 팔고 빚까지 얻어서 돌산을 샀습니다.

쓸모없는 돌산은 바로 애물단지가 됐고 빚더미에 올랐습니다. 빚잔치를 하자고 해도 막내가 입에 물고 있던 은수저까지 팔아먹었으니 남은 방책은 야반도주밖에는 없었습니다. 고단한 피신자의 생활 중에서도 당신이 거르지 않은 것이 있는데 차례를 모시는 것이었습니다. 북쪽 식이지만 조금 더 간소하고 절약된 상차림이었습니다. 당면을 많이 넣은 만두를 빚고 토란 탕국을 끓이고 전 두어 가지를 부쳐 상에 올립니다. 과일은 머리를 도려낸 흉내만 냈습니다. 그렇게 찾아올 사람도 찾아갈 곳도 없이 보내는 명절날 아침, 당신께서는 탁한 술로 음복을 하고는 회한처럼 취해 벽을 보고 누우셔서 잠든 척하며 외로움을 삭였던 명절의 기억입니다. 그렇게 외롭게 살다 가신지 오랜 세월이 지났습니다.  

지금의 나 또한 명절이라 한들 갈 곳이 없습니다. 젊은 마누라를 꼬드겨 동태전 두어닙을 부쳐 맑은 청주 한 잔과 더불어 음복을 대신합니다. 호젓한 것을 즐기는 편이라 그리 나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서로 어울려 살고 웃고 떠들고 다투며 사는 것이 제 몫이라 들었습니다. 갖가지 추억을 공유한 형제 친척들끼리 모이니 좋은 말만 오가는 것이 아니라 평소 서운한 것도 드러나고 쌓이고 맺혔던 것들도 풀어내는 명절 끝이 결코 개운하지만은 않습니다. 그렇지만 그런 과정 하나하나가 우리네 사람 사는 일이라 싸우고 끝났든 웃으며 끝났든 간에 그 모두가 사람과 사람의 일입니다.

예년과 같이 올해도 또 어김없이 보던 얼굴들이 모이겠지요. 한 해가 더 갔으니 그만큼 더 성숙해지고 깊어졌을 것을 생각합니다. 아쉬운 것은 털어내고 서운한 것은 잊고 좋은 것만 갖고 가는 그런 삶을 바랍니다. 예쁜 것만 보고 살아도 아쉬운 우리네 인생입니다. 더 아쉽기 전에 툭툭 털어내고 품어서 우리 사는 곳 모두 둥근 세상이 되기를 바랍니다. 보름달로 떴다가 그믐으로 지는 것이 우리네 사는 이치일 테니까요.

◇ 깡 마른 얼굴 콧날이 오똑한 그 아이

신준수 시인

추석에는 내 고향 화랏을 간다. 화랏은 영월 서강 자락 양지바른 곳이다. 옛날부터 꽃이 많이 피는 곳이라 해서 꽃밭이라는 뜻의 ‘화앗이 → 화랏 → 화전’이 되었다고한다. ‘화(花)’는 ‘꽃’을 ‘앗’은 순수한 우리말 ‘밭’을 뜻한다. 마을 어귀는 강과 산자락을 사이에 두고 길게 허리띠처럼 길이 나 있다.

황순원의 ‘소나기’를 읽은 건 중학교 1학년 때이다. 암청빛 칠판은 선생님이 써 놓은 소녀, 소년, 마타리, 갈꽃, 도라지 그런 단어들로 가득했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꽃 이름들이 낯설지 않아서 좋았다. 이맘쯤, 추석 무렵이었다.

내가 소설에 깊이 빠져든 건 서정적이고 시적인 문체가 아니라 막연한 연민과 설명할 수 없는 그리움이었던 것 같다. 그것이 내가 삶의 풍경들을 멀리 보기 시작 한 계기가 되었고, 번득임을 메모하는 수첩을 지니게 되었다.

노란 꽃으로만 알고 있던 꽃이 ‘마타리’라는 것을 처음 알았던 날은 밤새 잠을 설쳤던 것도 같다. 어떤 날은 ‘마타리꽃’을 꽃모갱이가 후줄근하도록 들고 다녔고, 또 어떤 날은 학교 가는 길에 한 아름 꺾어 친구들에게 나눠주기도 했다.

마을 어귀에 들어 내가 해를 등지고 섰을 때, 시시각각 변화하는 물빛은 울트라마린 그것이었다. 마타리꽃이 금빛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이 꽃을 좋아해” 키가 껑충한 마타리꽃을 한 아름 내밀던 그 아이. 깡 마른 얼굴에 콧날이 오똑하고 입술윤곽이 또렷해서 입맞추고 싶던.

오래된 풍경이다. 풍경이라면 자연의 경치를 연상하기 쉽지만 사람도 하나의 풍경이다. 풍경은 시시각각 변하고, 단명한다지만 마흔 몇 해가 지난 지금까지도 선명하게 남아 있는 풍경이다. 해마다 이맘 때쯤, 고향 어귀에 들어 양산처럼 노랗게 펼쳐진 ‘마타리꽃’을 보면 나는 콧날이 오똑한 그 아이가 떠오른다. 오래전 고향을 떠나 지금은 태백 어디쯤에서 정비소 일을 한다는, 이따금 풍문으로만 듣곤 하는 그 아이가.

하루에도 수천수만 개의 별똥별이 떨어지는 지구, 그 가운데 인간의 관점으로 치자 면이야 적막하기 이를 데 없는 시골이지만 나는 화랏에 들어 정체성을 세우고, 삶의 의미를 만든다. 나에게 ‘마타리’는 암청색 칠판이 보여준 거대한 우주였다.

일상의 어느 결에서 투명한 빛깔의 겹침이 만들어 내는 풍경들이 망막에 와 있다. 치장 없는 맨 얼굴로, 말보다 침묵처럼 비 온 뒤에 더 선명해지는 마타리꽃 그 사이 사이로 얼비치는 콧날이 오똑한 그 아이, 그 아이가 생각난다. 고향에 가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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