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사진 속에 담긴 1950년대 청주 무심천 기록, 이승우씨
<4> 사진 속에 담긴 1950년대 청주 무심천 기록, 이승우씨
  • 연지민 기자
  • 승인 2013.05.02 18:4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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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기억하는 사람들 충청인의 기록으로 본 시대읽기
오래된 사진첩에서 되살아난 추억속 청주

명함 크기만한 사진속 1950년대 무심천 고스란히
철교·용화사 7불교 … 지금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벚꽃나무 아래서 중절모 쓰고 '찰칵'… 패션 서구화 확인
애지중지 보통고시 합격증서… 개인의 영광이자 귀중한 자료

‘나무로 만든 섶다리가 있었고, 기차가 지나는 철교가 있었고, 큰 돌부처 7분이 물가에 서 있었다.’

아득한 옛 풍경같지만 1950년대 청주 무심천의 모습이다. 일제강점기와 6.25전쟁을 극복하고 근대화 과정에 막 접어들었던 당시 무심천은 어르신들의 기억에 의지해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왔다.

이처럼 이야기로만 듣던 옛 무심천 풍경이 60년 만에 시민기록자 이승우씨의 오래된 사진첩에서 오롯이 되살아났다. 한국 바둑계의 원로이자, 대한민국 보통고시 1호 공무원인 이승우씨의 기록에서 찾은 이 사진들은 1950년대 무심천과 청주 사람들의 문화, 생활상도 읽을 수 있는 귀중한 자료다.

보통 명함 크기의 옛 사진은 오랜 세월의 흔적처럼 누렇게 변해 있었다. 사진 속에는 전국 명소로 손꼽히고 있는 무심천 벚꽃길이 보이는데, 벚나무들은 현재와는 사뭇 다른 무심천을 바라보며 도열하듯 심어져 있다.

이승우씨는 “사진들은 1954년 군에서 휴가나와 기념으로 찍은 사진과 군 제대 후 공무원으로 충북도청 공보관실에 근무하며 1957년 경에 찍은 것들이다”고 설명했다.

60년 만에 다시 꺼내 보는 사진 속에는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흐르는 무심천 물길이 청주를 확인시켜 주고 있다. 1954년 무심천을 배경으로 찍은 사진은 당시 무심천 주변의 다양한 시설물을 볼 수 있다. 그중 가장 눈에 띄는 시설물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 철교와 용화사 7불의 옛 모습이다. 지금은 서청주 외곽으로 달리는 충북선 열차이지만, 1950년대 중요한 수송수단이었던 열차는 현재 청주 시청을 거쳐 충주로 출발했다. 수많은 사람들을 싣고 기적을 울리며 무심천 위 철교를 지났을 열차의 모습이 사진 한장으로 생생하게 그려지는 순간이다.

어르신은 “대교가 생기기 전에는 서문교가 큰 도로역할을 했고, 건너편으로 철교가 있었다”며 “열차는 물자 운송수단이기도 했지만 먼 거리 학생들이 학교를 다닐 수 있었던 등하교 이동수단이었다”고 회고했다.

또 다른 사진 속에는 용화사가 조성되기 전 7불의 모습과 그 앞 무심천을 잇댄 섶다리가 흥미롭다. 사람 키의 몇배가 넘는 부처상은 보물985호로 지정된 용화사 석불이다. 불상으로 배경으로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나들이 나온 시민들의 모습이 친근하게 다가온다. 그런가 하면 섶다리에서 찍은 사진 뒤로 무심천 제방과 벚나무가 확연해 국가 재건운동이 한창인 당시를 연상할 수 있다.  

어르신은 “1953년 6.25종전이 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살았다라는 안도감을 가지게 되었다. 이런 해방감으로 꽃구경도 하고 살자는 사회 분위기가 조성되어 무심천에 꽃이 피는 봄이면 그때도 나들이객들로 북적였다”면서 “지금이야 사진기가 흔하지만 당시에는 사진기사를 대동해야 해서 큰 맘 먹고 사진도 찍어야 했다”고 들려줬다.

제대 후 공무원 생활을 하며 찍은 1957년 경 사진은 무심천 제방사업과 공무원 신분의 중산층 남자들의 패션도 가늠해 볼 수 있다.

이 당시의 무심천은 벚나무길 외에 정비가 진행되고 있는 제방 모습이 우선 눈에 들어온다. 흙이 그대로 드러나 있는 천변 주변은 시민 문화휴식공간으로 조성된 현재의 생태하천과는 차이가 나지만 많은 사람들이 즐겨 찾았던 곳임을 보여준다.

또한 공무원들의 나들이 풍경이 담긴 사진속에선 중절모가 일상화된 모습이 인상적이다. 전쟁 후 미국문화가 파도처럼 유입되면서 패션도 서구화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어르신은 “50년대 후반에는 양복과 중절모가 유행했는데, 대부분 직장인들은 양복점에서 12개월 할부로 양복과 모자를 구입했다”며 “당시 최고의 멋쟁이들이 썼던 중절모는 5.16 이후 사라졌다”며 미소지었다.

1950년대 무심천 풍경외에도 어르신이 애지중지하는 자료 중 하나는 보통고시 합격증서다. 평생 공직자로 살다 직장생활을 마감한 어르신의 공무원으로의 출발을 알리는 이 문서는 우리나라 최초의 보통고시 합격증서이자, 수석합격증서라는데 큰 의미가 있다.

어르신은 “1949년 대한민국에서 처음으로 공채 보통고시가 치러졌다. 전국에서 900명이 응시해 32명이 합격했는데 필기와 구술면접에서 수석으로 합격했다”며 “이 증서는 개인의 영광이기도 하지만 전쟁이 일어나

기 전 치른 대한민국 공채 공무원의 역사이기도 하다”며 자긍심을 나타냈다. 무심코 찍었던 기념 사진 한장이 훗날 무심천의 역사로 보여지고, 소중하게 보관했던 개인 문서가 지난 시대의 역사로 기록되는 순간이다.

이승우 어르신은 공직 생활을 저서 ‘도정 반세기’로 기록화했다. 소박한 삶을 살아온 시민기록자들의 세심한 기록에서 시대 정신을 엿보게 된다.

◇이승우씨(81세)

충북 괴산군 청안 출생. 1950년 제1회 보통고시 수석합격으로 공무원 생활을 시작해 단양·보은·음성 군수, 제천·충주시장, 충북운수연수원장을 역임했다. 저서로 충북 도정 역사를 정리한 ‘도정반세기’와 한국바둑문화를 정리한 ‘청석기담’, ‘바둑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다. 현재 청주 모충동에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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