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르되 소유하지 마라
시간의 문앞에서
필자 기준 부모는 크게 두 종류이다. 자식을 인격체로 보느냐 자신의 소유물로 보느냐에 따라 부모와 학부모로 구분한다.
자식을 낳고 보니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 없고 내리사랑은 있어도 치사랑은 없다는 그 말 그 뜻 알겠다.
낳으실 제 괴로움 다 잊으시고 진자리 마른자리 갈아 뉘시며 회초리 치시고는 돌아앉아 우시던 그 심정도 알겠다. 허나 사랑은 오직 사랑이어야만 한다. 집착은 사랑이 아니듯 자식에 대한 집착 또한 내리사랑이 아니다.
“이제 장가까지 보내니 제 기도는 다 끝났네요. 스님.”
아들 결혼식 주례를 스님께 부탁하던 어느 보살의 말이었다. 스님과 동석하고 있던 필자는 이 말을 듣고는 귀를 의심했다. 절밥 꽤나 드시고 법당 바닥에 때 꽤나 묻혔을 보살 입에서 나올 말은 아니지 싶었다. 아들 하나 가르칠 만큼 가르쳐서 버젓한 직장 들어가고 이제는 장가까지 보내니 이제야 자신의 기도는 끝났다는 말이었다.
30년 넘게 절집 오가며 법당에 향 사르고 쌀 올리며 드린 기도가 헛되지는 않았다고 덧붙였다. 시원섭섭함에 후련함이 더해진 어투였다. 허나 나는 안다. 그리고 그녀도 분명 알고 있다.
그녀의 기도는 끝끝내 끝이 없을 것이다. 결혼은 결과가 아니라 새로운 문제의 원인이다. 그녀는 아들의 결혼이후에 발생하는 숱한 대소사로 다시 절을 찾아 부처님 앞에 스님 앞에 고민을 털어 놓을 것이다. 그녀가 불 놓은 수미단의 향과 초는 여전히 타들어갈 것이고 쌀은 꾸준히 올려 질 것이다. 그녀와 그녀의 아들식구들 이름이 적힌 법당의 연등은 해를 거듭할 것이다. 들어줬다고 믿으니 또 들어 달라고 빌어 볼 것이다. 그렇게 기도해왔으니 그렇게 기도할 것이다.
필자가 학부모로 분류하는 이들의 큰 특징이 있다. 자신이 이루지 못한 꿈이나 원하는 이상향을 자식이 대신해 이뤄주길 바란다는 것이다. 자식의 진로선택임에도 자식 본인들의 의견은 배제되고 결국은 묵살된다. 자식의 성취가 곧 자신의 성취가 된다. 그런 부모 밑에서 성장한 자식들은 성인된 후의 자신의 모습이 본인이 원했던 것인지 부모가 원했던 것인지 구분조차 할 수 없다. 학부모들은 자신들도 간절히 원하던 꿈이 있었음에도 그 꿈을 이룰 수 없었던 장애들을 자녀들에게 주입한다. 대게 본인 탓은 없다. 남 탓 아니면 외부적인 환경 탓이다. 자기합리화이자 자기정당화이다. 그러고는 자식들 스스로가 지금의 환경과 조건이 좋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역설한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내가 어렸을 때 우리 집이 이랬다면 나는 서울대 수 십 번도 갔겠다.”
전형적인 가스라이팅이다. 이 말을 들은 이들은 그렇다면 당신이 부모라고 부르는 이들은 도대체 어떤 이들이냐며 되묻는다.
답하겠다. 진정한 부모는 자식의 꿈을 응원한다. 꿈을 함께 찾아 주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해 다만 도와준다. 자신이 이루지 못한 꿈이 있더라도 강요하지 않는다. 자신이 어떤 환경에서 자랐던 간에 자식에게 만큼은 꿈을 이룰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하고자 노력한다. 부모는 자식을 소유하려 하지 않는다. 이 세상에서 떳떳한 존재가 되길 바랄 뿐이다. 이것이 부모의 도리이고 의무이다. 태어나고 싶어 태어난 사람은 단 한명도 없다. 모든 인간의 탄생은 욕심에서 비롯됐다. 그것이 성욕이었거나 자식을 갖고 싶은 욕구였거나 어쨌거나 욕심이었다.
내리받는 사람이 사랑으로 느껴야 내리사랑이고 맞는 사람보다 때리는 사람이 더 아파야 사랑의 매다. 자식을 위해 기도하는 이들이여. 하려거든 자식의 행복을 위해서만 기도하라. 집착은 사랑이 아니다. 기도는 조건부가 아니다. 일찍이 노자(老子)는 깨달았고 그래서 전했다.
생지축지 생이불유 (生之畜之 生而不有) 낳고 기르지만 소유하지는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