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담사에서

예술산책

2024-09-04     박창호 전 충북예술고 교장

지난여름 방학 중에 백담사로 템플스테이를 다녀왔다. 대단한 예술가는 아니지만 만학의 음악도라면 악상(樂想)을 찾아 어디론가 한번은 떠나 보아야만 할 것 같아서였다.

물길이 숨을 고르는 완만한 백담사 계곡에는 작은 돌탑들이 주욱 이어져 있었다. 설악산을 오르던 누군가가, 아니면 백담사에 머무르던 누군가가 설악산 계곡에서 수천 년 세월 동안 동글동글하게 다듬어진 돌들이 하도 예뻐서 돌탑을 하나 쌓았을 것이고 그 예쁜 돌탑을 보면서 또 다른 이들이 하나 둘 따라하면서 저렇게 주욱 돌탑들이 들어서게 되었을 것이다.

언제부터였을까? 사람들이 이곳에서 돌탑을 쌓기 시작한 것은….

천 년 전에도 백담사는 있었으니 신라 시대 자식을 원하는 어느 아낙이 공들이러 백담사에 올랐다가 계곡에서 잠시 땀을 닦으며 돌탑을 쌓았을지도 모를 일이고, 조선 시대 머리를 깎고 공부를 시작한 행자승이 경전을 읽다가 졸려서 눈 비비며 세수하려 나왔다가 나무아미타불을 염하면서 돌탑을 쌓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님만 님이 아니라 기른 것은 다 님'이라던 만해 선사도 님을 그리며 돌탑을 쌓았을지 모를 일이고, 떠들썩한 세상의 눈을 피해 백담사에서 은둔하던 전 대통령이 무료한 어느 날 하오에 계곡에 나왔다가 돌탑을 쌓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언제부터였을지, 그리고 누구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어느 시대 누구였건 돌탑을 쌓으면서 가졌던 마음들은 모두 하나였으리라. 돌탑들은 그렇게 누군가의 소망을 하나씩 끌어안고 소리없이 내리는 비를 맞으며 백담사 계곡에 말없이 줄지어 있었다.

물끄러미 탑들을 바라보다가 나도 하나 쌓아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잠이 비가 주춤한 틈을 타서 예쁜 돌을 하나 집어들고는 계곡의 아담한 바위에 자리를 잡고 그 돌을 올려놓았다. 그리고는 또 다른 예쁜 돌을 골라 그 돌 위에 올렸다. 그런데 돌이 흔들려서 돌 위에 돌을 올리기가 쉽지 않았다. 돌이 흔들리지 않도록 돌과 돌 틈을 고여 줄 고임돌이 필요했다. 예쁜 돌은 지천에 깔렸는데 예쁜 돌을 찾는 것보다 적당한 고임돌을 찾는 것이 더 어려웠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딱 맞는 고임돌을 놓고 나면 예쁜 돌은 단단한 반석처럼 고정이 되어 그 위에 돌을 또 올릴 수 있도록 허락하는 것이었다.

하나하나 돌을 올리면서 예쁜 돌만 가지고는 결코 돌탑을 쌓을 수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원하는 돌을 올려 놓기 위해서는 그것을 받쳐줄 작은 고임돌도 꼭 필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삶도, 음악도 그러하지 않을까? 음악은 아직 멀었다 치고 내 삶에서 이 예쁜 돌과 같은 것들은 어떤 것일까? 그리고 또 고임돌과 같은 것들은 어떤 것일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몇 개의 돌을 더 올려 작은 탑을 완성할 수 있었다.

탑을 쌓으면서 들었던 생각은 내 삶이라는 탑에는 차라리 올리지 않았으면 더 좋았을 돌들이 수북이 올려져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어쩌랴. 이미 쌓은 탑. 이제부터라도 그것들을 고임돌 삼아 더 멋진 탑으로 만들어 가는 수밖에. 나는 손을 모으고 내가 쌓은 탑을 향해 절을 하면서 마음속에 간직했던 소망이 이루어지기를 기원했다.

어느 날 장대비로 계곡에 물이 불면 이 탑이 있는 곳까지 물이 오를 것이고, 물살을 견디지 못하면 이 탑도 무너져 다시 계곡에 있는 일상의 돌로 돌아갈 것이다. 그렇게 탑이 일상으로 돌아가는 날, 탑을 향해 빌었던 내 소망도 일상이 되어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