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심공원 내 묘 이장 과정에서 엿 본 상장례
충북문화유산의 이야기
청주 중심지의 북쪽 무심천 서안에 위치한 명심산은 사적으로 지정된 신봉동 고분군이 위치한다. 청주시에서 이곳에 공원을 조성하기 위해 2022년부터 2024년 현재까지 매장유산에 대한 조사를 진행하고 있다. 신봉동 고분군의 보호를 위해 2022년부터 실시된 조사를 통해 명심산에 위치한 분묘의 형태는 1960년대 이후 조성된 토광묘(목관묘, 직장묘)가 대부분이었으나 조선시대에 조성된 회곽묘도 일부 확인되었다. 이러한 매장 방법은 매장에서 화장으로 바뀌어가는 요즘 보기 드문 사례이며, 이를 통해 1960년대 이후 장례문화를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이번 분묘 조사를 통해 우리는 전통적으로 내려온 상장례를 확인할 수 있었다. 상장례는 시신이 땅에 묻는 과정까지의 장례와 상복을 벗는 탈상까지 3년의 예를 기리는 상례를 모두 포함한다. 고려 말 성리학이 들어오면서, 조선에서는 상장례에 불법으로 숭상하는 풍토에서 『주자가례』에 따라 유교식 상장례를 치르고, 가묘를 세우고, 제사를 받들도록 변화되었다. 묘 이장 과정에서 상장례를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시신의 매장 방법, 시신이 입고 있는 수의 등이 있다. 이외에 이장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제례에서도 상장례의 일면을 엿볼 수 있다. 묘는 매장 방식에 따라 단장과 합장이 이루어졌으며, 합장은 매장 시 남자는 왼쪽, 여자는 오른쪽에 안치하는 것이 다수 조사되었다. 이러한 합장 방법은 남자는 오른편, 여자는 왼편에 매장하는 것에 대치되는 형태이나 조선시대 이후 잘못된 방식이 고착되어 나타난 사례로 보고 있다. 하지만 매장시 남자를 여자보다 더 높은 곳에 두는 전통은 전해져 남자가 안치된 바닥이 여자를 안치한 바닥보다 높게 조성되거나 남자를 약간 위쪽에 두고, 아래에 여자를 매장하는 형태도 확인되었다.
매장자는 염할 때 입히는 수의에 감싸인 상태로 다수 확인되었다. 수의는 대부분 삼베로 만들어진 것이었으나 일부는 나일론으로 저작된 형태도 조사되었다. 수의는 시신을 염습 할 때 입히는 옷으로 광해군 즉위년에 명칭이 처음 사용되었다. 이전에는 수의 대신 습의 라는 용어를 널리 썼다. 매장유구 조사 시 확인된 삼베 수의는 원래 우리 전통이 아니었다.
전통적인 수의는 조선시대 중기까지는 평상시 입던 의복(예를 들면 관리에게 관복, 선비에겐 유학자들이 입던 옷, 여성들은 혼례복)이나 혹은 새로 장만한 의복을 사용하였고, 후기에 오면서 형태나 크기로 보아 염습의 용도로 별도의 수의를 제작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수의 재료도 고급 비단이나 명주 등을 사용하였고, 삼베는 단지 염할 때 시신을 묶는데 사용하였다. 우리가 현재 사용하는 삼베로 수의를 쓰기 시작한 것은 1934년 일제 강점기이다.
일제 조선총독부는 간소화라는 명분 아래 “수의는 삼베나 광목 등을 쓰고, 고가의 비단은 사용치 말 것, 왼쪽 가슴에 리본을 달고 왼쪽 팔에 완장을 찰 것”과 같은 의례준칙을 만들어 이행하도록 하였다. 일제는 비단 등은 사치스럽고 고가라는 이유로 삼베 수의를 쓰도록 해 이것이 오늘날까지 이어지면서 전통 수의처럼 여겨지게 되었다.
이상에서는 상장례와 관련된 매장유산의 흔적을 간단하게 언급했다. 앞서 본 바와 같이 오늘날에도 상례의 방법은 종교와 경제 형편에 따라 다르지만 매장방식과 수의, 염습법은 유교의 영향이 강했던 조선시대 방법을 따르고 있다. 현재도 가풍이 엄격한 집안의 수의는 조선시대 예서의 기본이 되었던 『주자가례』의 격식을 지키고 있어 조선시대 중후기의 예복인 심의·도포 등이 사용되고 있다.
앞에서 살펴 보았듯이 1960년대 이후 명심산에 조성된 분묘의 매장자 안치법, 매장자의 의복, 파묘 이전의 제의 등에서 우리는 조선시대 이후 현재까지도 전통적인 상장례가 지속적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을 엿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