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삶
시론
모든 사람은 행복한 삶을 누리길 원하는데, 행복이란 과연 무엇인가? 매 순간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자신이 해야 하는 일을 성실하게 행하는 가운데 그 어떤 불만족이나 갈등이 없는 기쁘고 감사하는 편안한 마음의 상태를 행복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반대로 자신이 원하는 일을 행하지 못해서 불만족스럽거나 원하는 것을 성취하지 못해서 초조해하며 갈등하고 있는 불편한 마음의 상태를 불행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사막 한 가운데서 갈증이 극에 달한 상황이라면 흙탕물 한 모금을 마시는 것이 행복한 순간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배탈이 심하게 나서 아무것도 먹지 못하는 상황에서, 누군가 산해진미를 먹으라고 권함에 따라, 마지못해 억지로 먹어야만 한다면 그것은 행복이 아니다. 이 같은 맥락에서 행복한 삶을 누리기 위해선, 자기 자신을 정확히 아는 일이 급선무다.
자기 자신을 정확하게 모르면 자신과 함께 하는 세상의 일도 정확하게 알 수 없고, 심지어 안다는 생각이 착각일 가능성도 크다.
자기 자신과 자신이 처한 상황에 대한 정확한 앎이 전제되지 않는다면, 자신의 능력을 넘어선 분수 밖의 것을 성취하려는 욕심에 휩싸이게 되고 그 욕심은 결국 좌절로 이어지며, 화가 폭발하게 되고 끝내 이성을 잃고 어리석음에 빠져들기까지 한다. 욕심은 화를 부르고, 화는 어리석음을 부르고, 어리석음은 다시 더 큰 욕심을 부르게 된다.
이처럼 탐진치(貪瞋痴) 즉, 욕심과 화냄과 어리석음의 삼독(三毒)은 서로를 자양분 삼아 악순환을 반복하게 되면서 우리의 삶을 불행 속으로 곤두박질치게 만드는 주범이 되는 것이다. 욕심이 없다면 분수 밖의 일에 마음 낼 일이 없다. 분수 밖의 일을 하지 않으면 실패해서 좌절하고 아파하거나 화를 낼 일이 없고 화가 나지 않은 고요한 마음은 어리석지 않고 지혜로워서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진정으로 하고 싶고 잘할 수 있으며, 해야 할 일을 하면서 행복한 삶을 영위하게 된다.
행복한 삶을 누리기 위해선 그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에 대한 정확한 앎이 전제돼야 한다.
자기 자신에 대한 정확한 앎이 전제되지 않으면 자신이 분수 밖의 욕심을 부리고 있는 것인지, 능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소심하게 현실 도피 및 무사 안일에 빠진 줄도 모르는 채, 게으르고 나태한 삶에 안주해서 허송세월하고 있는지 알 수 없다. 자기 자신을 정확하게 모르면 자신이 처한 상황을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도 정확하게 알 수 없음은 너무나 당연하다.
이 같은 맥락에서 “너 자신을 알라”는 소크라테스의 가르침은 행복한 인생을 살아가기 위한 첫 단추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자기 자신과 자신이 처한 상황에 대한 정확한 앎이 전제되지 않으면 위험하게 과속을 하면서도 열정적인 삶을 누린다고 착각하거나 나태하고 게으른 삶을 살면서도 안분지족(安分知足)하며 무욕(無慾)의 삶을 누리고 있다고 착각하기 쉽다.
자신이 이른 봄에 피는 꽃인지, 늦가을에 피는 꽃인지 정확하게 알아야 한다. 지금이 봄인지 가을인지 여기가 부엌인지 우물가인지도 정확하게 알아야만 한다.
자신이 가을에 피는 꽃이면, 온갖 꽃이 만발하는 봄이 왔음에도 자신이 활짝 피어나지 않고 있음을 걱정하지 않고 우물가에 가서 숭늉을 찾다가 좌절하는 일도 겪지 않으니 이 어찌 행복한 삶이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