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와 신라의 국운 가른 옥천 관산성 전투
역사시선-땅과 사람들
사람들은 문화유산을 대할 때 크기, 시기, 특징도 중요히 여기지만 그 안에 담긴 이야기에 더 관심을 둔다. 문화재 조사·연구 업무를 하는 필자 또한 문화유산에 담긴 이야기의 중요성을 새삼 되새기곤 한다.
백제 후기의 역사를 장식한 성왕(聖王)의 죽음에 관한 전투 이야기를 간직한 옥천 관산성은 어떨까? KBS 교양프로인 `역사 저널 그날'에도 그날의 관산성 전투가 등장할 정도로 많은 사람이 관심이 있다.
이 관산성이 어디인지는 아직 정확하게 비정되지 않았지만, 학계에서는 옥천 삼양사거리 주변에 있는 산성 중 하나가 관산성의 후보지로 보고 있다.
이곳을 차지하고자 백제와 신라는 554년경 관산성 전투를 벌이게 된다.
관산성 전투에 관한 이야기는 그로부터 120여 년 전에 이루어진 나제동맹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백제와 신라는 전성기(광개토대왕~장수왕 대)의 강성한 고구려에 공동으로 대응하려고 433년에 동맹을 맺었다. 이후 551년에는 고구려가 약해진 틈을 타 백제의 성왕과 신라의 진흥왕이 힘을 합쳐 고구려가 차지한 한강유역을 백제는 한강 하류 지역(서울·김포 일대)을, 신라는 한강 상류 지역(춘천·여주·제천 일대)을 차지하게 된다.
그런데 진흥왕이 다시 군대를 밀고 들어와 한강유역의 백제 땅을 하나씩 하나씩 차지해 결국 한강을 전부 독차지하였다. 진흥왕의 배신으로 백제와 신라의 동맹은 깨져버렸고, 성왕은 태자 창에게 백제의 주력군을 주어 서라벌로 향하는 관문인 옥천의 관산성을 공격하게 하였다. 이때 신라에서는 백제에 맞서기 위해 김포지역을 지키던 김유신의 할아버지인 김무력과 보은 삼년산성을 지키던 고간 도도를 관산성으로 보냈다.
초반에는 백제의 태자 창의 예기가 매서워 관산성을 차지하는 등 승세를 잡았으나, 차츰 신라의 원군이 관산성으로 도착하자 전투는 교착상태에 빠졌다. 성왕은 아들 창과 백제군이 관산성에서 불리한 싸움을 하고 있다는 것을 들었다. 그래서 자기 자신이 백제군을 격려하려고 50명의 병사만 거느리고 전쟁에 나섰다.
성왕이 밤에 관산성 근처인 구진베루에 이르렀을 때, 첩자를 통해 성왕이 이곳을 향하고 있다는 것을 안 고간 도도가 일제히 습격해 성왕을 사로잡았다. 이때 성왕은 노비출신에 참수당해 죽는 비참한 최후를 맞는다.
성왕이 사로잡혀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백제군의 사기는 그야말로 나락으로 떨어졌다. 기세를 올려 쳐들어온 신라군에게 참패하게 되었으며, 창 또한 겨우 살아남아 부여로 후퇴할 수 있었다. 이 전투로 말미암아 신라는 대가야를 병합해 낙동강 서안을 차지하고, 나아가 북으로는 함경도 지역까지 진출해 이전보다 영토가 세 배는 넓어지는 전성기를 맞았다.
관산성 전투는 한반도 내 주도권을 확보하려는 백제와 신라의 전면전의 양상을 띠고 전개된 국가의 명운을 가르는 전투였으며, 이후 신라가 삼국 구도에서 주도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나아가 삼국통일을 도모할 수 있었던 매우 중요한 사건이라 할 수 있다.
이렇게 유명한 관산성 전투의 역사이야기를 가진 옥천 관산성이 아직 제대로 비정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은 안타까움을 가지게 한다. 이에 관한 문제는 향토사학회·학계·옥천군에서 지속적인 관심이 있으며, 각종 조사와 학술대회를 통해 그 실체에 조금씩 접근하고 있다.
앞으로도 옥천 관산성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과 고고학적 학술조사를 통해 백제와 신라 간의 전투 중 가장 유명한 관산성 전투의 구체적인 실체가 밝혀져 우리 앞에 살아 숨 쉬는 역사이야기 자원으로 다시금 다가오기를 소망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