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훈아의 매력과 향기(3)

김기원의 단말쓴말

2020-11-04     김기원 시인·편집위원
김기원

 

1947년 부산시 동구 초량동에서 태어난 나훈아(본명 최홍기). 그는 부산항을 오가는 배들의 뱃고동 소리를 들으며 자랐고, 그곳에서 친구들과 기타치고 노래하며 호연지기를 키웠다.

그랬던 그가 1965년 형을 따라 상경해 서라벌고등학교에 입학한 건 행이자 축복이었다.

입학 이듬해인 1966년에 `나훈아'라는 예명으로 데뷔곡 `천리길'로 가요계에 첫발을 내딛었고, 1968년 발표한 `사랑은 눈물의 씨앗'이 공전의 히트로 스타덤에 올랐기 때문이다.

간드러지고 구성지게 꺾는 창법으로 대중들의 사랑을 받자 그보다 먼저 인기 정상에 올랐던 남진과 라이벌구도를 형성하게 되었고, 앞서 거니 뒤서 거니 하면서 1970년대에 트로트 황금시대를 열었으니 가요계의 홍복이라 아니할 수 없다.

목포항 남진과 부산항 나훈아.

그들의 치열한 라이벌의식은 말투에도 영향을 미쳤다. 방송에서든 공연장에서든 남진은 전라도 말로 나훈아는 경상도 말로 너스레를 떨었다.

둘 다 고향을 떠난 지 50년이 훌쩍 넘었는데도 그러는 걸 보면 의도적인 면이 없지 않다.

어쨌든 나훈아는 가황답게 노래를 걸출하게 잘하는 그리고 작사 작곡도 능수능란하게 하는 불세출의 가인이다.

그럼 인간 나훈아는 어떨까?

솔직히 말해 인간 나훈아에 대해선 별반 아는 게 없다.

그와 일면식이 없는 필자로선 언론보도와 세간에 회자되는 풍문을 통해 그의 인간됨을 유추해 볼 수밖에 없으니 말이다.

더욱이 그가 아직은 현역가수이고 남은 삶의 행로 또한 섣불리 예단할 수 없기에 조심스럽기는 하지만.

아무튼 그는 좋게 보면 자유로운 영혼이고 얼핏 보면 자유분방한 인간이다.

세 번의 결혼과 세 번의 이혼이 그렇고, 그가 쓴 노랫말들이 그렇고, 간간이 내뱉는 시국에 대한 거침없는 비판들이 그렇다.

가수는 노래로 말하고 노래로 평가받으면 그로 족한 존재이다.

허나 언제부터인가 나훈아의 일거수일투족이 뉴스거리가 되고 가십이 되는 그리하여 그의 언행과 처신이 사회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는 묘한 인물이 되었다.

청춘에 대한 생각도 그 중 하나다.

`세월은 누가 뭐래도 흐르게 돼 있으니 이왕 가는 거 끌려가면 안 된다. 우리가 세월의 목을 딱 비틀고 가야 한다'고, `하고 싶은 대로 해보고, 안 가본 데로 가보고, 안 하던 짓을 해야 세월이 늦게 간다'며 그게 바로 청춘으로 사는 길이라고.

그 말을 입증이라도 하듯 74세란 적잖은 나이임에도 2시간 반 분량의 추석특집공연을 다이내믹하게 소화해냈다.

그의 `소신 행보'도 그렇다.

2018년 7월에 북측이 원하는 가수로 평양공연 명단에 포함됐지만 끝내 참석하지 않았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에겐 권력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는 걸 보여주었고, 못 가서 안달이고 갔다 온 걸 자랑처럼 여기는 세태에 경종을 울렸다.

이뿐이 아니다.

3곡만 부르고 와도 3000만(현시가 3억) 원 가량의 돈을 받을 수 있는데도 얼마 전 고인이 된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 초청공연도 거절했다.

`나는 내 공연을 보기 위해 표를 산 사람 앞에서만 공연을 하는 대중 예술가다. 허니 내 공연을 보고 싶으면 표를 끊어서 보라'며.

`삼성을 생각한다'를 저술한 김용철 변호사가 그래서 나훈아를 좋아한다고.

일본 공연을 가서 `쾌지나칭칭'을 부르다가 `독도는 우리 땅'이라고 외쳐 일본 극우세력과 야쿠자들로부터 살해위협을 받기도 했고, 대구시가 코로나로 힘들어할 때 힘내라고 수억 원을 쾌척하기도 했다.

이 외에도 회자되는 일화들이 많지만 지면상 줄인다.

호사다마라고 저잣거리엔 그를 비난하는 험담의 소리도 들린다.

여성편력도 그 중 하나지만 사생활이기에 논외로 한다.

인걸은 유한하나 노래는 유구하다. 하여 그의 농익은 노래와 명곡들이 봇물처럼 터져 나오기를 희원하며 글을 맺는다.

/시인·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