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인장의 가시
금요칼럼-시간의 문앞에서
가시 중에도 선인장의 가시는 가히 압권이라고 할 만큼 대단하다. 그 수에 있어서나 날카롭기에 있어서나 다른 가시를 압도한다. 그런데 이 가시가 왜 생겼을까?
어떤 사람들은 동물들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기린의 목이 긴 것은 키 큰 나무의 잎을 먹기 위해서이고, 상어의 이빨이 날카로운 것은 고기를 잡기 위한 것이고, 오리의 물갈퀴는 헤엄을 잘 치기 위한 것이고 이렇게 생물의 진화가 어떤 목적을 가지고 이루어졌다고 하는 주장을 목적론이라고 한다.
목적론은 인간의 사고 내면에 깊숙이 자리 잡고 있다. 목적론 내면에는 신이 인간을 창조하고, 창조는 신의 목적과 계획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라는 믿음 위에 서 있다. 하지만 뉴턴과 다윈 이후 근대 과학이 발달하면서 이 목적론은 점점 그 힘을 잃게 되다가 현대에 와서는 완전히 과학에서 추방되었다, 목적론이 과학이라는 영역 안에 설 자리는 전혀 없다.
선인장의 가시도 어떤 목적으로 생긴 것은 아니다. 만약 그런 목적으로 선인장의 가시가 만들어졌다면 설명할 수 없는 사실이 있다. 선인장이 지구 상에 나타난 것은 지구 상에 동물이 생기기 수억 년 전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선인장이 수억 년 뒤에 나타날 공룡, 기린, 들소들을 미리 걱정하여 가시를 예비했다는 얘기가 된다. 아무리 미래를 위한 준비정신이 뛰어난 선인장이라도 수억 년 뒤를 준비한다는 것은 놀라워도 너무 놀라운 일이다. 혹자는 `하느님이 하는 일인데 그 정도도 못할까?'라고 반문할 수 있을 것이다. 하느님은 만병통치약이다. 이해할 수 없고, 설명할 수 없는 일에 하느님을 개입시키면 모두 해결된다. 그게 하느님의 존재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과학자들을 그런 방법으로 설득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선인장의 가시는 잎이 변해서 된 것이고, 잎이 그렇게 변함으로써 건조한 사막에서 수분의 증발을 막아 생존에 유리한 조건을 갖추게 된 것이다. 이것도 선인장이 수분의 증발을 막기 위해서 자기의 피부를 가시로 바꾸었다고 하면 목적론적 설명이 된다. 선인장이 그런 의도로 가시를 낸 것이 아니다. 여러 식물이 있었는데, 다양한 변이를 통해서 여러 다양한 식물이 생겨났으나 피부를 가시로 변화시킨 선인장이 사막이라는 환경에 살아남기에 적합해서 살아남은 것뿐이다. 수분의 증발을 막기 위해서 가시가 생긴 것이 아니다. 가시가 생기고 보니 수분의 증발이 줄어들어서 사막에서 생존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선인장이 가시를 냈지만, 사막이라는 환경이 아니라 열대우림 환경에 처했었더라면 선인장은 멸종했을 것이다. 이것이 사막에 선인장이 많은 이유이다.
생물의 진화를 설명하는 이론이 `자연선택론'이다. 생존을 결정하는 것은 생물 자신이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환경이 결정한다는 것이다. 환경에 의해서 선택받은 생물은 살아남고 그렇지 않은 생물은 도태되는 과정을 거쳐서 지금의 이 지구 생태계가 만들어졌다는 것이 진화론의 설명이다. 이렇게 보면 지금의 이 지구 생태계는 우연과 우연의 연속이지 어떤 필연의 결과는 아니다. 다시 지구가 생긴다고 해도 지금과 같은 동물과 식물이 생길 것이라는 것은 절대 불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지금의 이 동식물은 물론 벌레와 같은 미물들도 어마어마하게 소중한 존재들이다.
인생도 비슷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당신이 지금까지 살아온 뒤를 한 번 돌아보아라. 당신 의도대로 된 것이 얼마나 있는가? 당신이 지금 그 지위에 있게 된 것은 당신의 의도라기보다는 당신의 결정이 당신이 직면한 환경과 잘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다. 환경이 달랐다면 당신은 지금과 같은 성공이 아니라 실패를 했을 수도 있다. 우리는 미래를 알 수 없다. 내가 지금 하는 준비가 좋을 수도 있고 쓸모없을 수도 있다. 그렇다고 손 놓고 있을 수는 없지 않은가?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 할 바를 다하고 기다릴 수밖에! 선인장의 가시처럼 행운이 찾아올지 누가 알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