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져 가는 생활도구 <61>
비녀
2007-01-11 충청타임즈
글·사진 김운기 편집위원
비녀는 쪽찐 머리에 꽂는 장신구다. 모양은 대개 한쪽 끝이 뭉툭하여 빠지지 않게 되어 있으며, 그 부분에 여러가지 모양의 장식을 했다. 비녀는 '계·채·잠'이라는 명칭으로 불렸는데, 비녀의 사용은 '삼국사기'에 '차'라는 기록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삼국시대부터 사용됐으리라고 추측되나 발전한 것은 조선 영조때 사치를 금하기 위해 모든 부녀자의 머리를 쪽으로 하면서 비녀가 일반화 되었다고 한다.
재료 · 문양 넣는 모양에 따라 종류 다양
비녀는 만든 재료에 따라 금비녀(金簪), 은비녀(銀簪), 옥비녀(玉簪), 백동비녀, 유비녀, 진주비녀, 비취비녀, 목비녀, 각비녀, 골비녀 등으로 불렀고, 비녀에 문양을 넣는 모양에 따라 봉잠, 용잠, 원앙잠, 오두잠, 어두잠, 매죽잠, 죽잠, 국화잠, 석류잠 등으로 불렸다.
비녀에 봉황을 새긴 것은 봉잠(鳳簪), 용을 새기면 용잠(龍簪), 꽃과 달을 새겨 넣으면 화월잠(花月簪), 매화와 대나무를 새겼으면 매죽잠(梅竹簪), 그밖에 국화 꽃잎이나 석류를 새긴 것도 있다.
일반 서민층의 여인들에게 최고의 비녀는 은비녀 오두잠(烏頭簪)이란 비녀가 가장 많이 사용됐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비녀의 길이는 평상시 11~17, 의식용은 17~34정도였다.
남자들의 상투는 1895년(고종 32년) 을미사변 직후 성립한 친일개화파 김홍집 내각이 개혁운동의 일환으로 '단발령(斷髮令削髮令)'을 내려 백성들에게 상투를 자를것을 명해 사라지게 됐다.
당시 최익현은 "내목은 자를 수 있으나 내머리는 자를 수 없다"고 반발, 나중 의병운동의 시발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일본의 강요에 의해 고종과 태자가 상투를 자르자 그후 민가에까지 상투를 자르게 되었으며, 가끔 올곧은 선비와 종갓집 노인들에게서 상투찐 모습을 볼 수가 있었으나 지금은 이마저도 볼수가 없게 됐다.
또한 비녀 꽂은 여인들의 쪽찐 머리가 사라진 것은 1950년 6·25한국전쟁 이후 서양문물이 들어와 '퍼머머리'가 유행하면서 시집가는 새색시도 쪽찐 머리 대신 퍼머머리를 하고 노년층까지 확대되어 지금은 국악인이나 역사드라마에서나 쪽찐 머리를 볼수 있게 됐다.
동백기름을 발라 반질반질 윤이 나고 정갈하게 빗어 쪽찐 머리에 비녀를 꽂은 여인의 모습은 한국여인의 단아한 모습을 상징했는데, 이 모습은 어느나라에서도 볼 수 없는 정숙한 여인의 표본이었다고 할 수 있다.
옛날 기생들이 교육을 받고 기방에 들어가면 돈많은 한량들이 첫날밤을 치르며 머리를 얹어 주는데 그 기생은 평생 동안 머리를 얹어준 첫남자를 잊지 못하며 살았다고 한다.
기생의 머리 올림은 곧 비녀를 꽂아 주는 의식이었다.
'그날 옷섶에서가만히 내어 주신 선물싸고 싸고 또 싸서보드러히 감초아 두셨던 옥비녀여!파릇 산듯 눈부신 그빛졸음 낀 눈이 총명스레 밝아집니다말없는 이비녀어느날 내머리에 꽂으리까그날이 오기까지 우리의 날이 오기까지품안에 간직하오리다(하략) '
모윤숙의 '옥비녀'라는 시가 새삼 가슴을 울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