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는 태국 치앙마이, 카렌족의 마을 고산지대를 오른다. 마을 입구에 들어서자 나뭇잎으로 지은 가게들이 줄지어 있다. 우기를 대비해서인지 땅에서 1m 정도 띄워서 지은 구조다. 너무도 빈약해 보이는 기둥에 의지해 나뭇잎을 얼기설기 덧대어 벽을 두른 집이다. 마치 이엉을 이듯 켜켜이 둘렀는데, 우기가 오면 비바람에 견딜 수 있을지 걱정스럽다. 그래도 몸을 누일 보금자리가 있으니,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카렌족은 고국 미얀마의 내전을 피해 이곳 고산지대까지 온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집 아래 열린 공간으로 햇살과 바람이 자연스레 드나들고 있다. 병아리를 거느린 어미 닭은 흙을 헤집어 먹이를 찾고, 거리를 어슬렁거리는 개의 무표정은 해탈한 고승을 연상케 한다. 어려움 속에서도 어미 닭과 병아리, 착한 표정의 개와 어울려 살아가는 사람들. 마치 어릴 적의 고향 마을처럼 따사로운 풍경을 보는 것 같다. 이곳의 닭들도 새벽이면 꼬꼬댁 여명을 알려주고 있을까.
다리와 목이 긴 닭이 신기해 따라간 시선에 손녀와 할머니의 다정한 모습이 들어온다. 대체로 무표정한 이곳 사람들과 달리 아이의 표정이 유난히 밝다. 머리에 화려한 두건을 쓰고 베틀에 앉아 천을 짜는 할머니의 목은 다른 사람의 두 배는 길어 보인다. 카렌족 여성들은 목이 길어야 미인으로 인정받기 때문에 다섯 살 때부터 목에 링을 끼워 자라면서 차츰 그 수를 늘려나간다고 한다. 그 어린 나이에 끼운 링을 죽을 때까지 잘 때조차 끼고 잔다니, 너무나도 잔인한 미의 기준이고 풍속이다.
한국의 가을 하늘보다 더 파란 스카프를 구입해 목에 두른 나는 할머니와 기념사진을 찍는다. 예닐곱 살쯤 되어 보이는 아이는 활짝 웃으며 손을 흔들어준다. 그런데 아이의 손에 연필이 들려 있다. 집 한쪽 벽에는 가방이 걸려있고 바닥에는 필통과 노트가 있는 걸 보니 학교에 다니는 것 같다. 남의 나라에 얹혀사는 상황에도 이 아이가 이리 천진난만한 것은 할머니의 사랑과 돌봄이 있기 때문이리라.
베틀 앞의 할머니를 보자니 그동안 까마득히 잊고 있었던 내 할머니가 불현듯 떠오른다. 우리 할머니도 베틀에 앉아 삼베를 짰다. 동네 사람들과 함께 삼나무 줄기를 삶아 벗긴 껍질을 몇 번씩 치대고 두들겼다. 수십 번의 과정을 거쳐 실을 잇던 할머니, 밤이면 그 거친 손으로 내 등을 쓸어 불안과 두려움을 잠재워주셨다. 나는 늘 몸이 약해 할머니에게는 아픈 손가락이었다. 나는 안다. 할머니의 사랑은 닳지도 않고 넘쳐흐르는 일도 없이 내 마음 깊이 차곡차곡 쌓이기만 했다는 것을. 세월이 흘러 어려움에 처했을 때도 그 사랑이 있어 굳건히 버터 낼 수 있었다는 것을….
그리고 보니 어느새 나도 할머니 반열에 서 있다. 얼마 전 손주 녀석들이 와서 며칠 놀다 제집으로 돌아갈 때였다. 마당에 나가 배웅하는데 녀석이 울먹이는 소리로 말했다.
“나 이제 할머니네 집에 안 올래요.” “왜? 서윤아, 할머니 보러 왜 안 오는데?”
“헤어지는 것이 너무 슬프고 마음 아파요….”
녀석은 마음이 너무 여려 작별할 때 늘 할미를 애태운다. 그래도 나는 걱정하지 않는다. 이 시간이 어른이 되어서도 때때로 힘이 되어 줄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나는 말없이 녀석을 꼭 안아주었다.
스카프값을 치르고 나오려는데 밝게 웃는 아이가 자꾸 마음을 잡는다. 학용품이라도 사주고 싶은데 여의찮아 지폐를 쥐여 주고 기념사진도 찍는다.
어려움 속에서도 꿈을 키워나갈 어린 소녀의 꿈을 응원하며 마을을 내려와 차에 오른다.